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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디아블로 코디 작가의 영화 ‘툴리’가 남자에게 묻지 않는 이유는?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디아블로 코디 작가의 영화 ‘툴리’가 남자에게 묻지 않는 이유는?
  • 전인수
  • 승인 2018.12.2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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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리'는 육아에 대한 영화다. 다만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전에 없이 현실적이다. 아이를 돌보는 장면들은 어떤 판타지도 없는 치열한 일상의 현장으로 묘사된다. 가정 내의 문제를 다루는 유사한 영화들이 관습적으로 허용 가능한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도 차이가 있다. 가족 영화들이 주로 주인공 서로 간의 오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툴리'는 주인공 자신과의 관계만을 중요하게 비춘다. 재미있는 것은 '툴리'의 작가와 감독인 디아블로 코디와 제이슨 라이트먼이 호흡을 맞춘 영화들이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스포가 있습니다.
'툴리'의 주인공 마를로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셋째까지 임신해 출산을 앞두고 있다. 마를로의 남편 드류는 최근 회사에서 승진했지만 매일같이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아내를 도와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싶지 않다. 마를로 쪽에서도 지친 남편에게 육아의 부담까지 주고 싶지는 않다. 마침 부유한 오빠 내외가 셋째를 출산하면 야간 보모를 불러주겠다고 권유한다.
 
툴리라는 이름의 보모가 불쑥 마를로의 집으로 찾아들면서 영화는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 “난 당신을 돌보기 위해 왔다” 말하는 툴리는 그야말로 만능 해결사다. 툴리는 마를로가 잠들었을 때 거실을 청소해두고 컵케이크를 만들어 놓는다. 마를로의 젊음을 상기시켜주고 남편 드류와의 밤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곧 툴리가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둘은 젊은 시절 마를로가 살던 뉴욕 브룩클린으로 향한다. 야간 보모인 툴리가 사실은 마를로가 불러낸 자신의 젊은 시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반전을 맞이한다. 브루클린에서 돌아오던 마를로가 전복사고를 일으키고 입원하게 되면서 툴리가 마를로의 결혼 전 이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툴리'는 주인공 마를로가 그간 정신적 착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반전을 통해 제시하면서 여성에게만 주어진 육아라는 버거운 현실을 공감하게 한다. 출산 후 이어지는 불면의 밤들과 젖몸살은 생생하게 묘사되면서 관객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더 나아가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를로의 모습은 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제하는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이끈다. 영화가 은근히 지목하는 것은 육아에서 배제된 남성의 역할과 그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다. 부유한 아내의 오빠에게 드류가 장황하게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다지 번번한 직장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 휴직이나 휴가를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격무를 시달리도록 하는 회사에 다니는 드류와 달리 마를로의 오빠 크레이그는 보모를 고용해 여유롭게 아이를 키운다. 영화의 결말은 남편 드류가 아내의 육아에 동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의문을 남긴다. 드류가 가난 혹은 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다. 과정을 생략한 결말은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의 연출 스타일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작품들에서 라이트먼은 결말의 방향을 불문하고 따듯한 감성으로 갈무리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왔다. 다소 중의적 결말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감독의 취향 탓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툴리'의 작가 디아블로 코디의 작품 성향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주노’(2007)의 한 장면
‘주노’(2007)의 한 장면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는 ‘주노’(2007)의 흥행을 이끈 뒤에 이어 ‘툴리’까지 세 작품을 함께 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여성을 소재로 하고 동시에 육아 혹은 임신의 문제를 다룬다. 세 작품의 결말은 모두 다소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것은 영화가 최초에 제시한 문제 상황이 말끔하게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주노’의 경우 뜻하지 않게 임신한 10대 소녀가 부유한 부부에게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을 다룬다. 주인공 주노는 입양 가정의 부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잠시 회의에 빠지게 되긴 하지만 결국 아이를 입양시키게 된다. 하지만 입양 부부가 이혼하게 되면서 애초에 원했던 것처럼 “모든 게 완벽한” 가정이 아닌 한부모 가정에 아이를 입양시키게 된다. ‘주노’의 엔딩은 주인공이 아이를 잘 떠나보내고 아이의 친부인 동창생과 뒤늦은 사랑에 빠지면서 끝이 난다. ‘주노’의 엔딩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애초 주인공의 목표와 다른 결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주노의 아이와는 무관하게 표현되는 로맨스에 도달하며 끝이 난다.
 
‘영어덜트’(2011)의 한 장면
‘영어덜트’(2011)의 한 장면
 
‘영어덜트’는 그보다 더 내밀하다. 대필 작가로 성공했지만 마음이 공허한 ‘메이비스’는 우연히 고향에 살고 있는 전 남자친구 ‘버디’가 아이를 갖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다시 로맨스를 꿈꾼다. 행복한 유부남을 꼬시려는 주인공의 터무니없는 시도는 영화 후반부 진실이 드러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창피를 무릅쓰고 부부의 잔치에 참석한 주인공은 과거 버디와의 아이를 유산한 경험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고 만다. 중요한 것은 메이비스가 시골마을의 소박한 행복을 꿈꾸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과거 유산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이비스는 마을에서 미친 여자로 취급받았지만 과거 자신을 동경한 동창을 통해 일말의 유명세와 명예가 있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다시 도시로 떠난다. 하지만 잠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나서자 망가진 차만이 자신을 반겨준다. 찌그러진 범퍼와 헤드라이트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메이비스는 그토록 어렵게 알게 된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했을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제이슨 라이트먼은 마지막 장면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마치 그저 그런 해프닝이 일어났다는 투다.
 
더 인상적인 점은 세 작품이 모두 아이를 가진 여성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남성이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주노’에서 주인공은 아이를 가졌음에도 생물학적 아빠인 남자 주인공에게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는다.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과 입양의 의지를 통보할 뿐이다. 그뿐 아니라 ‘주노’에서 남성 캐릭터는 단순히 로맨스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를 가졌을 때 그가 남자친구였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영어덜트’ 역시 마찬가지다. 유산의 상처는 주인공에게만 아프게 남아 있을 뿐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인공과의 추억을 회상하면서도 아픔은 공유하지 않는다. 그저 억지스러운 고백을 하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할 뿐이다. ‘툴리’에서 역시 마를로는 남편 드류에게 육아의 몫을 나누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키려 노력할 뿐이다. 회사에서 퇴근한 그가 침대에 누워 비디오 게임만 하고 있어도 핀잔을 주는 일도 없다. 이들 작품에서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역할이 제거된 존재들이다.
 
세 작품의 공통된 특성은 작가 디아블로 코디의 삶의 경험을 반영한 결과일 수는 있다. 작가가 살아온 삶에서 남성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존재로 비쳐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페미니즘이 위협 받는 현실을 상기해보면 이 영화들의 여성성은 상당히 독특하다. 여성들이 처한 가장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고통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이라면 작품의 여성들은 반대로 스스로 말문을 닫는다. 소수자들은 연대를 통해 혹은 보복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 영화들에서는 애초에 남성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어떤 의지나 의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여성의 주체성으로 볼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세 영화가 여성이 처한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을 주변과 관계시키지 않음으로써 성장 드라마의 정체성은 강화된다.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 ‘주노’의 주노는 자신이 관계를 나눈 남자에 대해 자신이 품은 감정이 지속가능한 애정인지 지나쳐가는 서툰 감정인지 확신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영어덜트’의 메이비스는 자신이 전 남자친구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이유가 실상 과거의 유산 경험과 결별 때문임을 모르고 있다. ‘툴리’의 마를로는 거의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다. '툴리'의 오프닝 장면에서는 자폐적 성향이 있는 둘째 아이를 말처럼 마사지 시켜주는 장면이 나온다. 예민성을 완화시켜준다는 말을 들어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 장면은 다시 반복된다. 다만 마를로는 아이의 의견을 묻는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아?”라고 묻자 아이는 “엄마 옆에 있는게 좋아”라고 답하고 마를로는 “나도 같이 있는 게 좋아”라고 동의한다. 그때서야 마를로는 “그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가장 앞과 뒤를 이루는 이 장면은 그가 지금까지 정확한 인지 없이 강요된 상황에 가위 눌려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마를로는 과거의 자신인 ‘툴리’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과거에 “반복되는 일상”과 안정적인 삶을 원했고 그것을 현재 성취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아이들의 요구에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아이들과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주노’ 에서는 주인공이 결과적으로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영어덜트’에서는 자신이 과거 유산으로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망가진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인지와 깨달음이 꼭 희망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주노’의 아이는 파양될 수 있으며 ‘영어덜트’의 메이비스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툴리’의 마를로는 다시 남편의 도움 없이 육아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스스로에 대해 보다 나은 인식을 얻었다. 또한 정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정서를 통해 영화를 매조지 하는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이들의 삶의 반경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삶이 명징하게 증명되거나 명명백백히 판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남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들의 결말은 모호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이다. 또한 완전하지 않은 우리들 자신의 불가해함을 그대로 드러내놓는다. 감독은 캐릭터의 복잡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관객들의 삶도 어떤 것이든 그럴 수 있다고 포용하는 것이다. 어딘가 지질하고 모자라 보이는 그의 작품의 캐릭터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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