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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뿌리인 국악을 지킬 정책적 배려가 절실”
“대한민국의 뿌리인 국악을 지킬 정책적 배려가 절실”
  • 정하연
  • 승인 2020.08.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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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립국악원 모보경 교수
전북도립국악원 모보경 교수 (사진= 류세호 기자)
전북도립국악원 모보경 교수 (사진= 류세호 기자)

 

“국악의 전통이 유지되면 이 민족이 죽지를 않는다.”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의 수뇌부들은 한국의 전통국악을 말살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국악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악을 ‘천민 음악으로 알고 있는 것도 모두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K-팝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지만, 국악은 여전히 ‘비주류 음악’으로 취급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악을 열심히 알리고, 한국인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의 모보경 교수 역시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최근 그녀는 ‘2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아 전북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멋과 소리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주에 위치한 전북도립국악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국악

대한민국 국민치고 ‘춘향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춘향가(春香歌)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로 전래되는 춘향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원래는 작자 미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신재효 선생이 수정해서 오늘에 이른다. 판소리로는 정정렬-김여란-최승희로 이어져왔고 모보경 교수가 최승희 명창의 뒤를 이었다. 최승희 명창은 전주에서 소문난 ‘소리꾼’이었으며 서울로 올라가 춘향가를 배웠으며, 이번에 전북무형문화재가 모보경 교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러니 소리꾼의 대(代)가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진 것이다. 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한 소감을 묻자 모 교수는 “어머니에게 효도했다”며 오랜 세월을 회고했다.
“젊은 시절에 판소리를 배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대중가수의 꿈을 안고 음반을 내기도 했고 영화판에서 굴러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 생활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었죠. 한번은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너 다시 내려올래?“라는 말 한마디에 일주일만에 짐을 싸서 다시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만큼 서울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만 있는 게 아니고 친정어머니의 시집살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머니 옆에 있어서 좋긴 했지만, 다시 판소리를 배우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이번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효도를 하게 된 느낌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자랐기에 그녀의 삶의 행보도 자연스럽게 국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예능을 잘하는 아이를 뽑아 현대무용과 가야금 등의 국악을 가르치는 무리에 속하게 됐다. 자연히 많은 선생님과 아이들의 주목을 끄는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서울국악예고에 진학해 처음에는 무용과를 다녔다. 하지만 또래에 비해 키가 크지 않아 군무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솔로를 해야 하는데, 이제 막 입학한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 솔로 자리를 내어줄 리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성악으로 바꿨지만, 오히려 거기에 승승장구의 길이 있었다. 판소리 심청가는 물론이고 경기민요도 시조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학교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진학을 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1월 1일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결국,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소리를 배웠지만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수 생활을 꿈꾸는 일종의 ‘외도’를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권유로 다시 전주로 내려온 것이 1998년. 그녀는 전북도립국악원 시간강사로 다시 소리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소 외도를 했건만, 그녀의 소리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2000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명창의 대열에 우뚝 섰기 때문이다. 
 

2013 세계소리 축제 완창(사진제공= 전북도립국악원) 
2013 세계소리 축제 완창(사진제공= 전북도립국악원) 

 

국악 전공자 일자리 더 많아져야
“어머니는 저에게 거의 칭찬을 하지 않으셨어요. 어쩌면 딸이기에 더 엄하게 가르치셨다고 봅니다. 대통령상 수상 당시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마치 얼굴에 화덕이라도 부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시면서 긴장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서울에서 초대를 받아 7시간 춘향가 완창을 한 뒤에서야 저에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3시에 판소리를 시작했는데, 끝나보니 밤 10시가 된, 정말이지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모 교수에게는 늘 의지할 수 있었던 큰 언덕이었던 어머님 최승희 명창이었지만, 최근에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위암 수술을 하기도 하고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다. 현재도 병원생활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 교수는 간병은 물론이고 수강생들에게 판소리와 장단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국악을 잘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지만, 그래도 좋아하시는 분들은 또 상당한 매니아이시기도 합니다. 동호회도 잘 형성이 되어 있고 7살에서부터 70세까지 전 연령대가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북도에서 지원을 해주어 수강료 6만 9천원이면 3개월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나마 65세가 넘으면 3만 원 정도입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국악을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도록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국악인으로 살아온 모보경 교수의 입장에서는 국악이 점점 쇠퇴하는 것 같아 아쉬움도 많다. 무엇보다 후학들이 제대로 길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국악을 전공해서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 결국 서양음악과의 퓨전을 하면서 자기 살길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가의 정책적인 배려와 함께 인식의 전환도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교육에서 국악의 쓰임새가 참 많습니다. 국악을 전공한 제 조카가 임용고시에 합격했는데, 막상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들의 기대가 많고 기존의 음악 선생님보다 할 일이 더 많다고 합니다. 국악이 고루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면 아이들의 교육에서 쓰일 부분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국인의 뿌리인 국악을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국악 전공자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보경 교수의 ‘국악의 현대화’의 방법에는 배울 점이 있다. 그녀는 공연을 할 때에 서양음악의 악기와 협연을 하지만, 전통 판소리 자체는 전혀 변형을 하지 않는다는 것. 국악의 전통도 지키고 대중성도 확보하려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전통 소리인 국악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러나 국악이 ‘일부 전문가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배려가 절실하다. 또한, 바로 이러한 길에서 모보경 교수가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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