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8:05 (금)
[칼럼]명상(瞑想)과 삼독심, 방어기제와의 관계성
[칼럼]명상(瞑想)과 삼독심, 방어기제와의 관계성
  • 정하연
  • 승인 2020.11.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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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달 박사(명상전문지도사)
김태달 박사(명상전문지도사)

명상(meditation)과 힐링(healing)은 모두 치유(治癒)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명상이 심(心) 즉, 마음치유를 목적으로 한다면, 힐링은 몸과 마음 즉, 심신(心身)치유를 목적으로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명상은 일반인들과 성직자에 따라서, 그 수도(修道)의 목적에 있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길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세간인 즉, 일반인들은 행복과 평온을 위함에 목적이 있다면, 출세간인 성직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바로 SMART를 근간으로 명상(冥想, 暝想)을 해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SMART란, Scientific(과학적), Mindfulness(마음챙김), Acceptance(수용), Resilience(회복력), Tranquility(평온성)의 약자인데, 과학적인 입증이 될 수 있도록, 마음 챙김을 통해, 수용성을 길러서, 탄력성 및 회복성을 증대함으로써 행복과 평온함을 얻고자 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욕망과 그로 인한 번민과 고통을 겪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이길래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며 매료되며 괴로움을 받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
라고 늘 생활하면서 뒤돌아보라고, 자기성찰을 해보라고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라쉬(Ramana Maharshi)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비차라(Vichara, Self-enquiry : 진아 탐구)를 권하였다. 
명상(Mediation)이라는 단어와 약(Medicine)이라는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약은 몸을 치료하고, 명상은 마음을 치유한다. 그래서 명상은 인간의 내면을 치유하는 약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자기 삶의 은둔처가 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자기 마음의 안식처로서 명상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명상은 체험이 강조된다. 그렇다 하여 주관적 고유 체험에만 한정해서 생각하면 곤란해질 수 있다. 개인이 느낀 황홀경, 느낌 등은 집단적 명상 체험(종교나 명상단체)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고, 집단적 명상 체험도 한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명상에 과학성과 합리성을 도입하여야 한다. 또한 명상은 흔히 고요히 있는 것, 혼자 있는 것, 내면을 바라는 것 등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명상은 삶의 현장을 떠날 수 없다. 일상생활 속에 모두 수행터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명상을 하는 수행터는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즉, 걷고, 머물고,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순간에 가능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선(禪)이 아닌 것이 없다.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라는 뜻으로 말할 때 사용한다. 어느 장소, 어떤 조건, 어떤 때와도 무관하게 가능해야 한다. 실연당한 아픔이 있어야 하고,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고민하는 고뇌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움을 느끼는 숨결이 필요하다. 거기서 영혼을 살찌우는 명상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명상이다. 명상할 때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명상의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매우 공허한 시간 낭비가 되거나 추상적이고 삿된 망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 싶은 것인지(힐링과 치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삶에 유용한 정신적 능력을 얻고 싶은 것인지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명상이라 칭해지는 행위들은 매우 다양하다. 명상의 방법론은 다양하다. 하지만 명상이 실제로 목적에 따른 효과가 분명한지 명확한 증거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에 의해 임상적 결과가 있거나 뇌파나 몸의 전자기파를 측정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였지만, 명상의 효과가 보편적으로 확실한 것인지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을 매우 분명히 가져야 한다. 목적이 분명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했더니 그 목적을 성취하였거나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명확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수행의 길에는 세간적 경지(lokiya, 예비단계)와 출세간적 경지(lokuttara, 성취단계)의 두 가지 구별되는 단계가 있다. 세간적 길은 수행자가 미덕(계율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 평온 또는 깊이 고요한 마음, 지혜를 계발하는 단계적인 수행을 시작할 때 닦는 길이다. 세간적 길은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으로 정점에 도달하여 바른 체험이 깊어지고, 동시에 모든 존재의 3가지 특성(無常, 苦, 無我)과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보게 된다. 열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세속적, 세간적인 열반이고, 다른 하나는 출세간적, 탈속적인 열반이다. 세속적인 열반은 명상자가 집착, 오개(五蓋)인 수행의 장애와 일종의 행복감에서 오는 위안을 놓아버릴 때, 매 순간 도달할 수 있다. 이 형태의 열반은 수행자가 진지하게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여러 차례 일어난다. 출세간적 열반은 오직 수행자가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으로 연기(緣起)를 보고 체험한 후에 일어난다(이것은 사성제를 체험함을 의미한다). 5가지 기능들(五根-믿음, 정진, 사띠, 사마디, 빤냐)이 성숙해지고 십이연기를 분명하게 볼 때, 세간적 길은 이제 출세간적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고(苦)의 소멸로 직접적이고 확실히 이끌기 때문이다. 

힐링의 대표적인 것이 요가(Yoga)와 필라테스(Pilates) 이다. 요가에서의 신체는 요가 동작을 하는 동안 관찰의 대상이 되며, 모든 감각이 일어나고 살아지는 기관으로서 요가 수련의 일차적인 수행대상이 된다. 특히 요가 동작을 통해 균형 잡힌 몸매와 바른 자세를 갖출 수 있는데, 올바른 자세를 취함으로써 바른 태도와 건강한 마음을 갖추는 것이 요가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의 체위법인 아사나(Asana)를 통해 우리 몸의 전. 후. 좌. 우. 상. 하를 고루 단련시킴으로써 근조직을 체계적으로 발달시키며, 근육과 인대를 늘리고 조이는 자세를 통해 척추와 더불어 근골격 및 관절의 유연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아사나는 요가의 체위법을 의미한다. 요가는 원래 해탈(영혼의 자유)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을 갖는 수행법이며, 아사나는 앉는 것, 멈추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이는 수행자를 완전한 정신집중 무아상태인 사마디로 이끄는 8단계 가운데 3번째이다. 수행자가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꼿꼿한 자세를 쉽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보통 산만한 상태와는 반대인 '집중된' 몸을 지니게 된다. 32가지 또는 그 이상의 아사나가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아사나는 연화좌이다. 인도의 시각 예술에서 아사나는 앉아 있는 신이나 사람의 자세 또는 그가 앉아 있는 좌석이나 옥좌를 말한다. 필라테스는 호흡으로 피로와 긴장, 몸의 독소를 바깥으로 배출시키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을 강화해주는 다소 독특한 신체조절 운동법으로, 몸을 유연하고 균형 있게 가꾸어 주고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아 주며, 근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힘, 유연성,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 필라테스와 요가 모두 스트레칭으로 유연성만을 기르는 운동 방법인 것 같지만 필라테스는 근력을 강화해주고 가늘고 긴 근육을 만들어 주는 운동으로, 기구를 이용하여 운동함으로 지루하지 않고 흥미로운 운동이다. 또한 안정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세교정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현재 많은 병원에서 척추 이상 환자들에게 재활운동 중 하나의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음은 오늘의 주제인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지금도 많은 내담자가 심리상담과 명상가를 찾고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고 있는 인간적인 부적응, 실직, 갈등, 외로움, 불안, 우울, 무가치감, 무의미 등을 고민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부딪치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이다. 예전에 비하면 삶의 조건들은 훨씬 풍요롭고 질적으로 좋아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코로나 대 유행병을 앓고 있는 지금 삶의 여러 지표는 사람들의 고통이 더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언제까지 1위라는 오명을 걸머지고 갈 것인가?. 그 원인은 인간의 삼독심인 탐(갈애), 진(감정), 치(환상)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마음을 평온상태로 유지할 방법이 있다면, 바로 그 치유법은 명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내담자에게 어떤 명상방법이 좋을까? 전문가라면 이들에게 적절한 명상방법을 제시하고 교육과 실참을 통해 유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탐심 즉, 탐욕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통해 오욕락(五欲樂) 즉, 재물욕, 명예욕, 색욕, 식욕, 수면욕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참선을 통해 일깨워주고, 진심 즉,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비관을 통해 자신과 상대방을 사랑할 줄 아는 방법을 지도하고, 산만한 사람들은 아나파나사티(수식법, 안반념법(安般念法)) 즉, 들숨날숨 호흡명상과 수식관을 활용한 참선방법으로 유도하고, 치심 즉, 자타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인연관을 통해 12연기를 일깨워주고, 업장이 두꺼운 사람에게는 염불관을 통해 업장을 녹일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유난히도 탐심과 진심과 치심으로 인해 스트레스, 트라우마, 우울증, 불면, 공황장애, 불안, 두려움, 분노 등으로 인해 내 품는 독은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육체에도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다양한 질병 암, 당뇨, 고혈압, 관절염, 뇌경색, 뇌출혈 환자 등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심인성(心因性) 질환이라고 한다. 마음이 괴로우면 육체도 괴롭게 되어있다. 그럼 그 마음의 독을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마음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은 바로 심신치유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불교와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고정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인간중심이론, 무조건적 긍정적 관심이론, 카운슬링의 이론과 실제, 인간중심 심리치료의 창시자 칼 로저스(Carl Rogers)의 인간중심 철학은 상담과 심리치료의 여러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가족 상담 분야, 집단상담 운동 일반심리학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여 에이브러햄 해럴드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와 함께 인본주의적 제3세력 심리학(the third force psychology)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인본주의 교육 운동에 선봉장 역할을 할 정도로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고, 산업, 지도성 및 행정, 종교, 의료 및 보건 분야, 예술, 연구, 지역사회개발, 정치학, 국제관계 및 평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영향을 끼쳤다. 로저스는 자기 개념의 용해는 우리를 경험하는 자아로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이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고정된 자아들로부터 고립된 것도 아니다. 자아 개념과 모순된 경험에 대한 부정이 방어와 타인에 대한 왜곡된 지각 방식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역으로, 자아와 개념의 제거와 더불어 우리는 더욱 우리의 경험을 수용(존중)하게 되고, 타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우리 자신을 방어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그래서 방어할 필요가 없을 때, 공격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은 방어기제(防禦機制)에 대해 알아보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아동 정신분석학자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는 마음의 평정을 깨트리는 사건들이 내적 혹은 외적으로 발생할 때, 발생한 불안감은 초자아를 위협하게 되며, 이때 자아가 불안을 처리하고 마음의 평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이다. 하지만 방어기제가 초자아의 이상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초자아와 원초아의 요구를 타협시키는 것이 방어기제이다. 라고 했다. 방어기제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방어기제가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겁한 것으로, 인간의 내적 성숙에 방해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막대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천천히 상처에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방식이다. 만일 스트레스 상황을 방어기제라는 완충재 없이 정면으로 직면한다면 그 피해는 막대할 것이다. 관건은 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방어기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방어기제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서로 반대되면서 충돌하는 2가지의 심리가 있는데, 방어기제(또는 방위기제)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의 가설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논문 “방어의 신경정신학(1894)”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대략 열 가지 방어기제들을 발견하여 정리했고, 21세기에 통용되는 방어기제의 종류는 비단 열 가지 이상으로 숱하게 늘어난다. 방어기제 이론은 정신분석학이 심리학에서 받아들여진 몇 안 되는 예이다. 방어기제는 신경증적인 구조에 속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행위 그 자체는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과정들은 보통 무의식으로 일어나며, 이때의 타협안들은 대체로 자기비하·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감정을 감추는 성격을 갖고 있다. 주된 방어기제에는 억압·반동형성·투사·퇴행·승화·부정·합리화 등이 있다. 억압은 원하지 않는 생각·감정 등을 의식으로부터 끌어내어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버리는 것이다. 투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그 감정이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며, 승화는 본능적인 욕구를 비 본능적인 통로를 통해 변형시켜 분출하는 것이다. 부정은 고통스러운 사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설명하는 주된 방어기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단계: 병리적인 방어기제(pathological defense mechanism)에는 부정(Denia), 분리(Splitting)와 기타 병리적인 방어기제 Conversion(전환), Distortion(왜곡). 
2단계: 미성숙한 방어기제(immature defense mechanism)에는 투사(Projection), 해리(Dissociation) 즉, 분열과 환상(Fantasy) 그리고 기타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Passive aggression(수동 공격성)과 Acting out(행동화). 
3단계: 신경증적 방어기제(neurotic defense mechanism)는, 합리화(Rationalization).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 억압(Repression),  퇴행(Regression), 취소(Undoing), 전위(치환; 전치, Displacement),주지화(intellectualization)와 기타 신경증적 방어기제 Upward and downward social comparisons(사회적 상하 비교). 
4단계: 성숙한 방어기제(mature defense mechanism)는 동일시(Identification), 승화(Sublimation) 그리고 기타 어른스럽다고 정의하는 방어기제로 Humor(유머), Altruism(이타주의), Suppression(억제), Patience(인내), Acceptance(수용), Tolerance(용인), Anticipation(예측),  Emotional self-regulation(감정적 자제), Emotional self-sufficiency(감정적 자부). 
5단계: 기타 방어기제로는 보상(Compensation)이 대표적이다.


내담자의 당면 문제의 해결과 정신적 고통의 극복 더 나아가 인간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 상담이다. 종교 또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를 했다. 그중 불교는 한 인간이 인간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발생했으며, 불교의 궁극적 목표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와 상담이 인간의 정신적 성숙과 심리적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불교와 상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상담심리학과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상호 관련성 및 응용을 위한 연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관심의 영역이 불교와 심리학, 불교와 상담이론의 비교, 불교 수행방법의 상담 장면에서의 활용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되고 있다. 인간중심 상담 치료자들이 치료 관계에서 시도한 것을 어떤 기법이나 수단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태도들을 구현하는 특정한 방식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담자 상담을 할 때는 무엇보다 세 가지 태도(일치성, 존중, 공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이유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받아 주고 소중히 여김을 받을수록 자기 자신을 보는 태도를 더욱더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며 들어줄 때,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하고 있는 흐름에 좀 더 정확하게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길 때, 그 사람의 자기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더욱 일치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 진실하게 되고 더 진짜가 된다. 이러한 성향들, 즉 치료자의 태도의 호혜성은 사람이 더욱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게 해 준다. 참되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내담자가 치료자의 촉진과 더불어 하는 일은 자신에 대한 존중, 공감, 일치성의 결여를 극복하는 것이다. 


석가세존의 출가 동기는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중아함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오늘도 이전에도, 나는 오로지 두 가지만 설하였도다. 괴로움(苦)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여기에서 ‘괴로움’은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불만족’이며, 불교는 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여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보편성은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사성제 중 첫 번째이다. 나머지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더는 법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괴로움이 본질적으로 ‘갈애’와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갈애가 종종 괴로움의 원인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갈애 그 자체가 그 자신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오해에 뿌리내리고 있음(misperception)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어떤 고정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정서적인 오해에서 기인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은 서로 배타적이다. 그들은 한순간의 마음에 같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① ‘탐(貪)’은 ‘집착’ ‘욕망’ ‘달라붙음’ 등의 해석이 가능하다. 탐욕에 사로잡힘, 사물 또는 사람을 소유하려 들고, 세계를 삼키려 들어 모든 것을 내 안에 가지려 하는 것을 뜻한다. 독립 또는 분리, 나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한다. ② ‘진(嗔)’은 ‘혐오’라고 볼 수 있다. 증오뿐 아니라 두려움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은 탐과 어떤 면에서 보면 반대이고 또 다르게 보면 매우 비슷하기도 하다. 어쨌든 탐이 무언가를 ‘갖고’ ‘꽉 쥐는’ 것이라면, 진은 무언가를 ‘없애려는 것’ 또는 자신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집착, 갖거나 없애야만 한다는 것, 바로 ‘~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보통 괴로움을 낳는 갈애의 두 가지 측면들로 간주한다. ③ ‘치(癡)’는 ‘망상’ 또는 ‘무지’로 해석된다. 특정한 형태의 무지, 동기가 부여된 무지이다. 치는 명확하게 보지 않으려는 갈애이며, 따라서 서구 심리학자들의 억압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또한 ‘관성’과 ‘어리석음’의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나 타인을 보는 고착된 또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방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치’는 자신의 ‘자아’를 실재하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로 여기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환영과도 같은 자아지각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대승불교에서도 탐(貪), 진(嗔), 치(癡) 셋을 독이라고 하여 삼독(三毒)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듯이, 초기 경에서도 해로움의 뿌리는 바로 이 세 가지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불탐, 부진, 불치를 유익함의 뿌리라 하여 강조하고 이 탐·진·치가 모두 다 소멸한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 설하고 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불교에선 다양한 종류의 명상이 존재한다. 두 가지 핵심적인 수행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통찰) 명상, 또는 지(止)와 관(觀)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타 명상은 단순히 특정한 경험에 개인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엔 호흡에 포함된 감각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종류의 명상에서 수련자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판단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린다. 핵심은 경험과 머물면서 마음이 고요해지게 놔두는 것이다. 통찰 명상은 보통 사마타 명상이 약간 능숙해진 뒤에 도입되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수행자가 경험과 머물 수 있게 됨을 비추어보고 평정심을 유지하게 된다. 


무상(無常)이란, 오온(五蘊)이 항상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몸[色]은 변한다. 우리의 느낌[受]은 변한다. 우리의 생각[想]은 변한다. 우리의 의지[行]는 변한다. 우리의 인식[識]은 변한다. 이같이 관찰해서 일체를 떠나라. 일체를 떠나면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 해탈한 그때, 미혹된 삶은 끝난다.” <상윳타 니카야 23 : 13, 無常(1)>
모든 현상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 생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없어지는데, 이 무상에 저항하고 무상한 현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에 갇히게 된다. 생물은 무상하기 때문에 죽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태어난다. 이 무상에 저항하는 건 그야말로 소용없는 저항이다. 그래서 무상을 절감하고 거기에 자신을 내맡겨야 저항과 집착이 희박해져 평온함에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사리불이여, ‘고, 고’라고 합니다만, 어떤 것을 고라고 합니까?” “벗이여, 이런 세 가지가 고입니다. 그것은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입니다.
벗이여, 이 세 가지가 고입니다.” <상윳타 니카야 38 : 14, 苦>
고고(苦苦)는 통증·갈증 등과 같이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괴로움이고, 행고(行苦)는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이다. 괴고(壞苦)는 애착하는 대상이 파괴되어감으로써 받는 괴로움이다. 중생의 5온에는 집착이 번성하므로 고이고, 또 이 5온에 집착해서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을 일으킴으로 고(苦)이다. 중생의 마음은 모든 현상을 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추하다 등으로 분별해서 그 2분의 한쪽을 회피하고 다른 한쪽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계의 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회피와 집착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어디에 집착하거나 무엇을 회피한다는 것은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불안하다. 그래서 고(苦)이다.
①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 [一切行無常],  ②모든 의식 작용은 고이다. [一切行苦],  ③모든 현상은 무아이다. [一切法無我],  ④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 [滅盡爲涅槃]를 4법인(法印) 이라 한다. 법(法)은 ‘붓다의 가르침’이고, 인(印)은 ‘특징’이라는 뜻이다. 4법인 면에서 ④를 빼고 3법인 이라고도 한다. 안팎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생멸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 현상들의 진행을 모두 무상·고·무아라고 통찰하는 게 불교의 길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고·무아라고 거듭 알아차리고 거듭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그것들의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열반으로 가는 세 관문이라고 한다.​ 이 관문에 이르기까지 선정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선정(자나-janna)은 팔리어로,  많은 의미가 있다. 선정은 명상 단계들(meditation stages) 또는 깨어 나감(계몽, illumination)을 의미한다. 선정들은 깊은 평온(tranquility), 지혜, 고요, 열린 마음(opening of mind)이 강조되는 길을 지어나가고 완성한다. 사마타(Samatha)를 통해 삼매에 들어야 하는데, 사마타의 더욱 정확한 의미는 평화로움, 평온, 고요함이다. 일반적으로 번역된 몰입 또는 고정된 집중이 아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평온(Tranquility)으로 옮긴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마음의 평정을 이루어 일반 세속인들은 행복의 시간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깨달았을까? 사마타 수행을 통달한 후에 보리수 아래에서 12 연기를 반야로 관찰하였다. 이것은 팔리어 원어로 보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현상적인 대상을 갖는 의식을 본래 있는 반야 관으로 입체적으로 포착하여, 대상을 갖는 의식에서, 탐진치를 제거하고, 12 연기에서, 중도를 실현한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깨달음의 원리이다. 요약하면, 사마타(止) 수행을 통해 마음을 한곳에 오롯이 정지시키고, 즉, 삼매에 이른 다음 위파사나(觀) 수행을 통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체득, 12 연기(十二緣起)를 통해 중도(中道)를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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