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그림자 그리고 태양 – 유대인이 남긴 지혜 속에서

2025-08-19     홍석태 기자

 

꿈 때문에 깜짝 놀라서 전등을 켰다. 시계는 새벽 4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 시간, 나는 꿈속에서 교회에 있었다. 예배 중에 옆자리에 앉은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교회에 오시게 됐어요?”

잃어버린 돈을 찾아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러요.”

그 말에 여인은 단호히 말했다. “여기는 누구의 잃어버린 돈을 찾아주는 곳이 아닙니다.”

나는 반문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데요?”

그녀는 조용히 설명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며, 서로를 격려하고 돕는 공동체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곳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동안 멍했다. 잃어버린 돈을 찾으려던 나를 여인은 하등한 욕망에 집착하는 존재처럼 여길 때, 꿈에서조차 수치심이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잃어버린 돈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꿈은 단순한 허상이 아니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몽' 즉 내면의 갈등과 현실의 미완성을 반영한 꿈에 가까웠다. 돈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 상실감, 그리고 불안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젊은 시절, 내 삶이 고단하고 회의로 가득했을 때, 새벽 종소리를 따라 처음 교회를 찾았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뒤로 갑니다. 그러나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가 앞을 가립니다.”

그 말씀은 내게 하나님을 향하면 근심은 뒤로 가고, 그분을 등지면 근심은 코앞을 가린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후 나는 오랜 세월 그 말씀을 잊고 살아왔다.

50여 년이 흐른 지금, 꿈은 내게 다시 그 설교를 떠올리게 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이었다. 그리고 돈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수단으로서 하늘에서 보내진 존재입니다. 돈을 선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 소유해야지, 너처럼 나를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면 나는 네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는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이 내 근심과 불행의 출발점이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은 내게 경고처럼 다가왔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이 말씀들은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돈이 우상화되어 신앙을 대신할 수 없고 자칫 돈이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돈이 주인이 되면 하나님이 중심이 될 수 없고, 결국 그 아끼던 조차도 우리 곁을 떠난다.

그러나 고민이 생겼다. 현실에서 교회도 운영비가 없으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전도도 멈출 수밖에 없다. 돈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도구인데, 신약성서에서는 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나는 구약성서와 유대인의 지혜에 눈을 돌렸다. 그들은 돈을 우상이 아닌 도구로 보았다. 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삶을 선하게 이끌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구약의 인물 중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등 거의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부자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유대인의 지혜, 탈무드도 말한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세 가지는 고뇌, 다툼, 빈 지갑이며, 그중 빈 지갑이 가장 크다.”

유대인은 돈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 돈을 관리할 지혜를 강조한다. 부자가 되는 것도,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모두 돈을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돈에 대한 관리를 훈련하라는 기준이 있었다.

1970년대 한 유대인 가정에서 보았던 일화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자녀에게 한 달치 용돈(25전 동전 30)을 자녀 서랍에 넣어주고, 하루에 하나씩만 꺼내 쓰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절제, 우선순위, 충동 억제 등을 배우게 하는 훈련이었다. 또한 대학을 다니는 자녀들에게는 용돈을 저축, 소비, 기부, 투자 네 항목으로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돈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삶의 윤리이자 신앙이었다. 이것이 바로 돈을 수단으로 다루는 삶이다.

 

이와 달리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체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돈은 하늘에서 주신 도구일 뿐, 그 쓰임이 선한지 악한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뿐이다. 구약은 돈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기독교 계열에서 다녔다. 그 탓인지, 친구 중에는 장로, 목사님들이 꽤 있다. 그중 어떤 친구 목사님은 가끔 이렇게 농담처럼 말한다.
가보지 않아서일까? 천당 이야기는 잘 안 하게 된다.”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그것은 단순한 친구 간의 농담이 아니었다. 코흘리개 친구이기 때문에 목사인 자신도 민낯을 보일 수 있었다. 죽음 이후의 천당과 지옥의 영적 삶만을 강조해온 설교들이 오늘의 삶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에 사는 일부 기독교인이 처한 상황이다.

구약은 을 죄악은 물론이고 죄악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의 열매요,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서의 현실적인 자원으로 다룬다.

네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편 128:2)

밭의 이삭을 다 거두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며,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레위기 19:9-10)

 

돈은 삶을 지탱하는 도구이자, 공동체를 위한 윤리의 시작점이었다.
고리대금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이 아닌 동체의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구약은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가 경건의 척도로 굵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돈에 대한 직접적 정의는 줄어든다. 예수님은 재물보다 당연히 하늘의 나라를 말씀하셨고, 바울도 복음과 사역, 그리고 자립적 삶에 집중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신약은 돈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 사용에 대한 구체적 지침은 비유와 간접적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아마도 당시 유대인 사회에 이미 돈의 윤리가 충분히 체화(體化)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동기와 천국 가치를 강조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은 여전히 땅 위에 있다. 그리고 문제는 오늘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돈을 벌고, 쓰고,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교회는 천국만 이야기하고, 돈 이야기는 피하거나 불편해한다. 이러니 한현실의 삶에서 신앙은 점점 멀어지고, 교회는 설득력을 잃는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오늘의 교회는 구약처럼은 아니라도 돈이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돈에 대한 정의를 오늘의 교회에서는 다음에 서처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 ‘정직한 수고의 열매다. ‘하나님이 맡기신 자원이며, 우리는 그것을 청지기처럼 관리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가난한 자를 돕는 신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마음의 방향을 비추는 영적 거울이다. 라고 정의를 하자

<   하늘은 말하지 않았는가, 아니, 말씀하셨다>

하늘은 돈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씀은 율법의 조항 속에만 있지 않고, 비유와 태도 속에 숨어 있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자신의 자산을 선용하지 않은 종을 책망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경영학 기초에서 언급이 된다.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필요하다고 !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돈을 타인을 살리는 데 사용함으로써 이웃이 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기의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 하셨다.” (마태복음 19:21) 하늘은 말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을 다스리라.”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영혼과 공동체)을 맡기겠다.”

<결 론>:

돈이 천국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천국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나는 바란다.
우리의 신앙이 구약처럼 땅을 딛고, 신약처럼 하늘을 바라보기를.
그리고 돈이 탐욕의 도구가 아니라, 은혜의 도구로 회복되기를. 돈을 통해 하늘을 사는 법,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믿음의 경제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돈은 내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

()는 수단으로 창조된 존재다. 목적이 아닌 참된 일에 수단으로 나를 맞이할 때, 나는 다시 너와 함께하리라.”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녹이 나도록 갖고 있어라.”

나는 문득 어머님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내가 집 떠나 서울에서 공부할 때다. 그러나 그간 어머님의 그 말씀을 잊고 살았다.

지금 나는 조용히 새벽 예배의 종소리를 그리며 기다린다.

찬바람을 가르며 들려오던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 펄펄 흰 눈 날리던 그 새벽, 그 소리가 내게 속삭인다.

이제, 너는 네 그림자의 위치를 밝힐 태양을 다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