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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10-23 22:40 (금) 로그인회원가입
컬처노믹스

삶도 이별도 서툴렀던 두 사람의 이야기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을까. 왜 자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았을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아버지를 지켜보며 들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10년 동안 요양원에서 생활했고, 저는 그 긴 시간 아버지의 삶을 외면했습니다. 딸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오히려 아버지의 인생을 원망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무책임했던 삶을 말입니다.

아버지의 지난 했던 삶을 이해하고, 원망과 죄책감으로 버티기 힘들었던 마음이 고마움으로 바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바르게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는 내 안의 분별과 아만심을 발견한 뒤였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만의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 이후였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도 자기 삶을 바꾸기 위해 오랜 시간 외롭게 애썼을지도 모릅니다.

 전까지 제게 죽음은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고 난 후에야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듯, 제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 사람의 생과 마침표를, 그리고 제게 주어진 삶을 오래 사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이 아프고 슬펐지만, 제게는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능인 스님의 원고를 읽고 매만지는 마음도 달랐습니다. 한때 삶을 포기하려 했던 수행자의 고백,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환자들,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사연은 낯선 누군가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경험과도 맞닿아 있었으니까요.

 능인 스님과 저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삶과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스님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 곁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저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에야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에게 비슷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필연적으로 마주할 이별 앞에서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할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스님이 말하는 ‘단정한 죽음’은 고통 없이 평온하게 죽거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듯 하루를 돌아보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기쁨도 아픔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가꾸어 온 하루하루가 삶의 마지막과도 이어진다고 스님은 이야기합니다.

돌이켜보면 한때 삶을 포기하려 했던 수행자도, 아버지를 원망하며 그 삶을 외면했던 저도 살아가는 일과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에 서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작은 일부터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책상 위를 정리하고, 스스로에게도 조금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배운 마음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에도 늘 서툴지 모릅니다. 그래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오늘 하루만큼은 조금 더 정성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능인 스님의 글에 제 마음도 함께 보태어 전하며,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오늘도 조금은 단정하고 다정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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