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를 찾아 떠나는 유라시아 대평원 - 함영덕 작가
[연재] ‘나를 찾아 떠나는 유라시아 대평원 - 함영덕 작가
  • 함영덕
  • 승인 2018.09.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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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편 -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탄생한 도시 피렌체
 
 
시스틴예배당과 최후의 만찬
성서를 주제로 거대한 양탄자에 500년 전의 예수와 교황에 대한이야기를 담은 회랑을 지났다.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이탈리아 전역의 지도가 전시된 지도회랑을 지나면서 느꼈던 감동은 시스틴예배당에 그려진 ‘천지창조’의 천정벽화를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미술책이나 그림책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천지창조의 웅장한 천정화와 벽면 한 칸을 전부 장식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면 르네상스 거장들의 예술적 투혼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조각한 ‘피에타’를 보고 감명을 받아 프레스코 벽화를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3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틴예배당의 천정화를 의뢰했다. 미켈란젤로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불같은 성품의 율리우스 2세와 영원히 담을 쌓고 지낼 각오를 해야 했다.
 
그림 그리는 순서조차 몰랐던 미켈란젤로가 거대한 시스틴성당의천정에 프레스코벽화를 그려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였다. 미켈란젤로는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교황을 찾아가 시스틴예배당처럼 중요한 건물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하며 라파엘로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교황은 그의 간곡한 청을 거절했다. 프레스코벽화를 그려본 최고의 경험자를 피렌체에서 불려 들여 그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회화의 기법을 깨우쳐나갔다. 마침내 회화의 메커니즘을 모두 배웠다는 확신이 서자 피렌체 화가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성당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피렌체 화가들이 그린 것을 모두 지우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피렌체 화가들은 미켈란젤로의 독선에 불만을 터트리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천지창조’는 르네상스의 낙관적인 시대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거의 닿으므로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중앙부분에는, 천지창조로부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이전까지의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어려운 천정벽화를 짧은 시간에 그 이전도 그 이후에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회화의 세계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지창조 중 아담의 탄생
 
천지창조’가 완성된 지 23년이 지난 후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을 그려주기를 요청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하듯이 장식적인 것을 철저히 무시하고 인간을 그리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시스틴예배당 제단 뒷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당시 회화에서는 완전히 벌거벗은 사람을 그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시선이나 얼굴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시 회화의 공식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식담당 추기경인 비아지오 다 체제를 대동하고 미켈란젤로가 작업하고 있는 곳을 자주 방문했다. ‘최후의 심판’이 절반쯤 완성되었을 때 바오로 3세의 의전 담당관인 비아지오 추기경에게 미켈란젤로의 벽화에 대해 의견을 묻자 추기경은 “이런 그림은 교황의 성당보다 여관에 어울리는 것”이라며 폄하했다. 이 말은 들은 미켈란젤로는 격분하여 제우스와 에우로파의 아들이며 지옥의 재판관인 미노스의 모습으로 벽화의 오른쪽 밑 지옥의 입구에 뱀이 칭칭 감고 있는 가슴 위에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최후의 심판이다. 부처님께서 구업口業의 무서움과 그로 인한 해악을 일찍이 설파하셨다.세치의 혓바닥 하나로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마음에 상처와 평화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에피소드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을보냈다. 1541년 크리스마스에 그 그림을 공개할 때 그의 나이는 벌써 67세였다. 미켈란젤로와 경쟁을 벌였던 브라만테는 1514년, 라파엘로는 152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예술의 신처럼 우뚝섰고 모두가 그의 작품을 모방할 뿐이었다. 마침내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부터 망령처럼 그를 따라 다니던 음모와 질시를 이겨낸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경쟁자를 잃게 되면서 그를 온전히 평가해줄 사람마저 잃고 얻은 서글픈 승리였다. 1980년부터 ‘천지창조’의 천정화 위에 수백 년 동안 누적된 떼와 두터운 먼지 층을 닦아내는 복원작업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진행되었다. 복원된 그림들의 색채를 보면 현란하고 생기가 넘치며 화려했다. 색채가 빈곤한 화가로 알려진 미켈란젤로에 대한 통설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면죄부 파문을 일으켰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대리석으로 장식한 웅장하고 넓은 홀이 나타난다. 벽면에 장식된 아름다운 문양과 그림들은 형형색색의 대리석을 모아 만든 것으로 돌의 아름다움과 그 다양한 색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성당의 길이는 전장이 210m이며 돔의 높이는 13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당시의 카톨릭 신앙에는 죄지은 자가 죽어서 가는 세 곳이 있었다. 착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사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며 아기들이나 일생을 통해 약간의 죄를 짓고 살았거나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연옥으로 가서 깊은 신앙과 간절한 기도를 거쳐 회개를 한 후에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이 있었다. 기도는 시간이 걸렸고 중세 시대에도 시간은 돈이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성당의 재건에 전력을 다했지만 자금부족으로 진척이 부진했다. 교황은 가능한 좋은 의미에서 면죄부의 판매에 나섰고 도미니크수도회의 사제 텍셀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노수도회에 몸담고 있던 마틴 루터는 아흔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고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제기하여 결국 교회를 신구교로 갈라서게 만들었다.
 
 
판테온신전과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판테온(Pantheon)은‘모든’이라는 의미의‘pan'과’신‘을 의미하는’theon'이 합쳐진 말로 원래 로마의‘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는 의미이다. 이 범凡 신전은 기원전 27년 로마의 정치가 아그립파에 의해서 시저의 가문(율리아 가문)의 수호신인 일곱 개 행성의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세워졌다.
 
판테온의 기본 형태를 이루는 반구半球는 우주를 상징하며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인 거대한 눈은 행성의 중심인 태양을 상징한다. 그리고 둥근 천정에는 각 격자마다 청동별로 장식되어 내부에서 보면 천제 속의 우주를 느끼게 만든다. 천정에 뚫린 지름 9m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하늘에 뜬 둥근 태양이 신전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눈부시다. 마치 태양계의 중심과 자신이 가까운 거리에서 교감하고 있는 것 같은 근엄한 느낌을 들게 한다. 판테온은 로마제국의 빈 공간이다.
 
모든 신을 위한 공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빈 공간이어야 했다. 비어 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제신들의 공간이다. 판테온은 서기 608년 동로마의 포카황제의 승낙으로 교황 보나파치우스 4세는 판테온을 이교도 신전에서 그리스도교 성전으로 바뀌어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개명되었다. 판테온은 그리스도 성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후에 다른 신전들과는 달리 약탈과 파괴를 면할 수 있어서 오늘날처럼 그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엠마누엘레기념관으로 향했다. 흰대리석으로 장식한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밝고 당당한 젊은이 같은 기백으로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헌정된 것으로 1885년에 착공되어 1911년에 완공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틈바구니 속에 억압받아 오던 이탈리아는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군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 비오 9세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엠마누엘레기념관은 유서 깊은 베네치아광장과 캄파돌리오언덕 사이에 세워졌는데 베네치아광장이 원래 간직하고 있던 르네상스의 분위기와 고대 로마시대부터 신성시되어 오던 캄피돌리오언덕의 분위기를 안타깝게도 파괴하고 말았다.
 
성 베드로대성당의 위용에 도전이라도 할 듯한 규모와 기상을 담은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당시 이탈리아 건설을 외치던 이상주의자들의 과대망상증을 그대로 반영한 건축물이라고 혹평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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