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3:53 (목)
[칼럼] 컨테이너 속 마음챙김 명상의 심리적 효과
[칼럼] 컨테이너 속 마음챙김 명상의 심리적 효과
  • 정하연
  • 승인 2020.10.14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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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달 박사 (명상전문지도사, 공학박사, 기술사, 시인)

 

김태달 박사 (사진= 김태달 박사 제공)<br>
김태달 박사 (사진= 김태달 박사 제공)

“슈퍼맨의 부흥” 을 보면, 포터는 앉아서 명상(冥想, meditation)하는 것보다 훌쩍 날아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몰입(沒入)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생략하는“ 방편이었다. ”나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포터는 이렇게 말했다. ”15초의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 2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목숨을 걸고 그곳에 곧바로 도달할 수도 있다. 그때의 쾌감은 몇 시간 동안 지속한다. 그래서 명상을 하는 장소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이라! 고 했던가. 개인에 따라 몰입해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수행터로 지난 4년간 미안마의 마하쉬사야도 센터도 순룬사야도 센터도 국내 유명한 사찰도 아닌, 국내에 있는 지하철역 근처 컨테이너 속 조그마한 무료급식소 “사랑의 복지회”를 선택했다.
신도림역 2번 출구 “사랑의 복지회” 설거지통에서 무료급식자들의 식판을 매번 200여 개씩 닦으며 몰입 즉, 삼매에 들어가고 마음챙김을 통해 필자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랑의 복지회 (회장 김인섭)“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무료급식소를 20여 년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지난 약 4년 동안 매주 2번 정도는 그곳을 방문해서 마음챙김을 하며 정진했고, 그곳 무료급식자들과 애환을 나누고 또 명상지도와 실참(實參)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가 온 세상의 관계를 중단시키고 있는 현재,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일주일에 2회 무료급식을 했던 이곳도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컨테이너 속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 전에 마련했던 작은 명상교육에 매번 참석했던 한 노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분은 유난히 소인의 명상강의와 법문을 귀담아들었고 마음에 크게 감응과 위로를 느낀다며 하루도 결석하지 않는 분이 있었는데, 지금 그분이 매우 보고 싶다.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고 있는지 크게 걱정이 된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서 그분들 곁에서 움켜쥔 배에 허기를 달래줄 수 있기를 크게 기대해 본다. 위에서 컨테이너 속 설거지통에서 깨달음을 얻었노라 감히 말을 했다. 깨달음이 뭔가?. 참나(眞我)를 찾아서 나아 갈 때 그곳에 건강도 행복도 평화도 있으며, 마음속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라고 알고 있다.
소인이 “사랑의 복지회”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참나 즉, 보잘것없는 자신 즉.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 마음 속 삼독심(三毒心)을 깨끗하게 씻고 다스리기 위해 무료급식자들이 가져온 식판과 잔 밥통을 정성껏 깨끗하게 닦았고, 대학교 교수라는 직함도 기술사라는 명예도 다 내려놓고 비움으로써 얻는 그 희열감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움의 미학(美學)이요, 행복이요, 이것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애심의 발원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연민심까지 갖는 자비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SMART를 기반으로 한다. SMART란 Scientific(과학적), Mindfulness(마음 챙김), Acceptance(수용), Resilience(탄력성), Tranquility(평온)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불교는 유일신을 믿고 추종하는 종교가 아닌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구제받는 종교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경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근본을 이해하면 바로 아하!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연기(緣起)의 세계관이다. 즉, 12 연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연기(緣起)란,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자신을 포함한 일체 경계는 인연(因緣)으로 생기(生起)한 법(法)이며, 그 본질은 무아(無我)요, 공(空)이라는 도리를 투철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에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가 들어가 있고, 승의제(勝義諦) 또는 제1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하는. 진제(眞諦)와 세속제(世俗諦) 또는 세제(世諦)라고도 하는 속제(俗諦)가 들어가 있다. 사법인(四法印)이 들어가 있고, 무아(無我)/공성(空性)이 들어가 있고,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들어가 있고, 해탈/열반이 들어 있다. 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법인(四法印)은 부처님의 깨달음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이며, 특별히 두드러진 사상인데, 이른바 삼법인설(三法印說)이다. 여기서 법인(法印)이란 불법(佛法)이 즉, 인감도장이다. 라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어느 경전이든 법인 사상에 합치되지 않으면 이를 바른 불법(佛法)이 아니라고 판정하였다. 인(印)이라고 한 이유는 법인으로, 사실이며 진리로서 허망하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고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가 포함되면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한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현상은 변화한다. 제행(諸行), 즉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현상법은 한순간의 정지도 없이 변한다는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통해 집착이나 교만을 버리고 겸허와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시간,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제법(諸法)이란 일체만법(一切萬法) 다시 말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의 존재를 일컫는다. 무아(無我)의 아(我)는 형이상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의 아(我)는 상식적인 의미가 있음에 반해, 無我의 我는 자신(自)을 주(主)로 삼고, 자신을 의소(依所)로 삼아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할 때의 자(自)와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무아(無我)란 아(我)가 아니다. 혹은 我의 상태가 아니다. 라는 뜻을 알게 된다. 무아는 비아(非我)라고도 번역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라는 말보다 공(空)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다. 따라서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존재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라는 의미다. 즉,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뜻인데, 실체란 생멸 변화를 벗어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범부 중생은 이를 경험하고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체의 존재 여부를 따지고 다루는 것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금하고 있으며, 이 가르침 또한 집착을 여의고 자비심을 발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제법무아는 불교의 독자적인 교리라 하겠다. 

3) 열반적정(涅槃寂靜): 번뇌의 불이 꺼진 조용한 상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현상계(現象界)에 관한 불교의 철학적인 진리관인데,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불교의 종교적인 실천이성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체현될 이상세계를 말한다. 열반(涅槃)이란 불어서 끈다. 혹은 불어서 꺼져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탐욕, 진에(瞋恚) 어리석음을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적정(寂靜)이란, 말 그대로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모양을 말한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은 모든 번뇌를 버리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는 의미가 있게 된다. 

4)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모두 고통이다. 무상이고 무아인 존재를 존재 그대로 놓고 본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객관적 존재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의 주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째,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유상(有常)이요, 유아(有我)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의 헛된 욕망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이 욕망의 불만족으로 인하여 무상이고, 무아인 것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둘째, 무상이고 무아인 존재를 놓고 무상. 무아 그 자체에 빠져 어차피 무상이요, 무아라 하여, 모든 것에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기 때문이다.

 무료급식소 “사랑의 복지회” (사진= 김태달 박사 제공)

12 연기의 핵심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나”라는 존재가 창조되기까지 인연 맺어 탄생해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12 연기는 무명(無命), 행(行), 식(識), 명색(命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를 일컫는다 노사는 생을 연하여 있고, 생은 유를 연하여 있다. 유는 취를 연하여 있고, 취는 애를 연하여 있고, 애는 수를 연하여 있고, 수는 촉을 연하여 있고, 촉은 육입을 연하여 있고, 육입은 명색을 연하여 있고, 명색은 식을 연하여 있고, 식은 행을 연하여 있고, 행은 무명을 연하여 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연기설은 본래 사실 세계의 현상 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그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양하여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기설은 우리에게 가슴 설레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 구제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괴로움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절대적.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연기되어 있음으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괴로움을 해결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조건과 원인은 인간 자신의 진리에 대한 무지이며,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의 불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깨달음을 통해 우리 마음의 탐애와 무명을 제거하면 곧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인본주의 종교, 마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도 불교의 핵심 진리인 연기법의 이러한 내용과 특성에 말미암은 것이다.12 연기는 무명(無命), 행(行), 식(識), 명색(命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를 일컫는다. 라고 했다. 이들의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무명(無命): 연기의 근본 원인과 진리에 대해서도 무지(無知)한 상태, 무아  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상태를 일컫는다.
2) 행(行): 신구의(身口意) 삼업 즉,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며, 무명의 상태로 끊임없이 활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3) 식(識): 인식작용을 뜻하며,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선, 악의 분별의식) 
4) 명색(命色): 분별의식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나타남. 명은 정신세계, 색은 물질세계를 뜻한다.
5) 육입(六入): 눈, 귀, 코, 입, 몸, 의식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감각과 지각의 능력을 의미한다.
6) 촉(觸): 육입이 빛깔, 소리, 냄새, 맛, 몸의 촉감, 의식 육경(六境)에 접촉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7) 수(受): 접촉한 결과로 즐겁고,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일컫는다.
8) 애(愛):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욕망, 애착, 열망, 갈애를 일컫는다.
9) 취(取):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취하고 버리는 실제 행동를 일컫는다.
10) 유(有): 애와 취로 인하여 업을 짓는 것을 일컫는다.
11) 생(生): 업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12) 노사(老死): 생의 현실로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순관(順觀)이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신 것이다. 또 유전(流轉) 연기란,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계속 연기되는 과정이요, 환멸(還滅) 연기란,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을 멸하여 해탈로 향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12 연기법의 첫 번째가 바로 무명(無明)이라고 했다. 무명(無明)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명(明)은 밝음, 곧 지혜를 뜻하므로, 무명(無明)은 어두움, 즉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을 뜻한다. 어리석음이란 곧 치(癡)이다. 탐진치(貪瞋癡)에서의 그 치(癡)다. 탐진치(貪瞋癡)는 모두 마음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탐심/진심/치심이다. 무명(無明)이 곧 치심(癡心)이다. 그래서 중아함경에 보면, 12 연기를 설명할 때 무명(無明) 대신에 치(癡)라고 기술하고 있다. 무명(無明)이란 즉,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밝음, 즉 지혜는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혜이다. 모든 것의 존재 방식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혜이며,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바로 무명/무지다. 어리석음이란 단순하게 멍청하다는 뜻이 아니고, 잘못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진= 김태달 박사 제공)

중생들은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그 모든 것들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도 영원불변의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하기 때문에 애착, 즉 탐심이 생겨나고, 그 탐심이 좌절되거나 방해가 되면 진심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탐진치(貪瞋癡)이다. 탐심과 진심의 뿌리는 바로 치심(癡心) 즉, 무명이다. 무명(無明)이란 모든 것들의 존재 방식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법실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공”과 “인과”이다. 본질은 실체가 없어서 공(空)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실에서는 인과로 흘러간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무명(無明)이란, 진제의 “공(空)”과 속제의 “인과(因果)”, 이 둘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이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핵심이 바로 “공(空)”과 “인과(因果)”다.
만물은 불성(佛性)이 있다. 고 하는 것은 연기(緣起)의 법이 만물에 적용되는 보편성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일체는 공성(空性)”으로써 평등하다는 뜻이지, 불성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체 중생은 불성이 있다. 고 하는 것은 공성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중생의 본성이 공성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성(佛性)은 공성(空性)이다. 이것이 공성과 불성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일체의 법(法)은 허깨비 같고 꿈과 같다. 실체가 없으니 유(有)가 아니며, 본래 없으니 무(無)라고 할 수도 없다. 일체 법은 양변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음으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이와 같은 경계를 실체 있음(常見)과 실체 없음(斷見)의 양변에 떨어지지 않고 중도(中道)로서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연기즉공(緣起則空)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면 정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심이 곧 정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初發心時便正覺)
깨달음은 현실적으로 자아(自我)는 물론, 육경(六境)을 상대하면서 무아(無我)요 공(空)이라고 육근(六根)으로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 고통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가? 소승과 대승을 막론하고 깨달음을 방해할 뿐 아니라, 모든 번뇌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무명이란 어떤 것이며, 무명을 비롯한 번뇌는 어떻게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은 완성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무명(無明)이란 연기의 세계관 즉, 인연으로 생기하는 모든 법은 그 본질이 무아(無我)요, 공(空)이라는 도리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意識)이다. 이러한 무명으로부터 모든 번뇌가 발생하고, 번뇌는 죄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일체 경계를 상대하면서 그것들이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탐진치(貪瞋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명마저도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세계관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를 만나면 무명번뇌(無明煩惱)는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신 분이며, 그 진리의 내용은 바로 ‘연기’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5온(五蘊), 12처(十二處) 등 일체법(一切法)의 분류,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도 모두 연기법을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한 가르침이다. 불교 교리가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연기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약해보자 12연기(十二緣起)에서 연기법의 기본 원리는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래의 시(詩)로 간명하게 표현하셨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 『잡아함경』 제30권 335경 「제일의공경」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존재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이것과 저것의 의존관계와 상관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와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와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關係性)”을 뜻한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항상 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맺고 있다. 하여 연기법을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 말하기도 한다.
끝으로 필자가 깨달음을 얻고, 연기법에 의해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기까지의 스토리를 엮어보겠다. 시절인연(時節因緣)과 선근인연(善根因緣)으로 결과를 얻은 것을 바로 실증함으로써 앞에서 열거한 모든 글의 의미에 대해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실증은 다음과 같다. 물론 혹자(或者)에 따라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복지회”를 통해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하는 것을 명상수행자는 절대로 봉사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다른 봉사자들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그런 마음을 갖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 설거지통과 잔 밥통과 쓰레기통이 소인의 마음을 닦는 수행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료급식소에 오시는 독거노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탁발 나오신 스님들로 보이기까지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로 이것이 8 해탈의 길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환희심에 젖는 경험도 한다. 8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팔해탈법(八解脫法)을 숙지하고 수행해야 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설명(說明)하신 내용(內容)이다.

1) 제1의 해탈(解脫) : 자기 마음속에 애욕(愛慾)이 있더라도 따라가지 아니하고 상대인 여인(女人)의 몸에 대해 실상(實相)을 바로 관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제2의 해탈 : 마음속에 색욕(色慾)의 번뇌는 없되 아직 색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자는 다시 상대의 색신(色身) 부정함을 파괴하여 남은 애정(愛情)을 깨끗이 끊어버리나니, 이것이 안으로는 색욕이 없되 밖으로 상대의 색신을 관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3) 제3의 해탈 : 범천이나 성인(聖人)과 같은 깨끗한 행(行)을 성취한 몸을 관찰하여 탐욕(貪慾)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나니, 이것이 청정(淸淨)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4) 제4의 해탈 : 모든 색욕이 생각이 뛰어나 상대의 색신에 대한 애착(愛着)이 있어 초연하며 모든 애욕의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공(空)의 끝없는 경계에 들어가 선정을 성취하여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머무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5) 제5의 해탈 : 이러한 공무변처를 뛰어나 주관적(主觀的)인 즉, 자기의 정신 자체인 식(識)이 한량없는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어 그 선정(禪定)을 성취하는 것이다. 식무변처구족주(識無邊處具足住)라 칭한다.
6) 제6의 해탈 : 다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뛰어나 주관과 객관적(客觀的)인 경계가 다 끊어진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달하여 머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무소유처구족주(無所有處具足住)라 칭한다.
7) 제7의 해탈 : 무소유처를 뛰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달하여 머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초일체무소유처(超一切無所有處) 입비상비비상처구족주(入非想非非想處具足住)라 칭한다. 
8) 제8의 해탈 : 이번엔 비상비비상처를 뛰어나 모든 생각과 감수작용(感受作用)이 다 멸진되어 적정부동(寂淨不動) 하는 절대경지(絶對境地)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라 칭한다.

이러한 완전한 열반의 8 단계를 알고, 그곳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데는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고비를 넘어야 한다. 고 생각도 하며, 수행 정진하며 생활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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