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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수교 30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한‧베수교 30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 시사뉴스매거진
  • 승인 2023.09.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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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송무백열(松茂柏悅), 산고수심(山高水深) 관계로 발전되어야 한다.
베트남 KGS국제학교 안경환 이사장 칼럼
베트남 KGS국제학교 안경환 이사장

지난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하여,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국민에 대한 친근감을 심어주고, 마음속의 앙금을 풀어 주었다. 우중에 호찌민 주석 묘를 우산도 안 받치고 헌화하고, 김건희 여사가 영부인으로는 최초로 아오자이를 입고 선을 보인 것, 대통령이 한국어 교사들과 학생들 앞에서 베트남어로 인사한 것 등등, 모두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세밀한 외교적인 설계가 이루어 낸 큰 성과였다. 작년 12월 22일로 한국과 베트남이 역사적인 외교정상화를 이룩한지 30주년이 되었는데, 지난 한‧베 수교 30년사는 900여 년의 두 민족 교류역사에 비하면 1/30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1992년 수교 당시 5억 달러(4억 9천만 달러)에서 2021년에 807억 달러를 달성하여, 29년 만에 무려 161배나 증가하였고, 조만간 양국 간 연간 교역액 1,000억 달러, 한국의 베트남 직접투자 누적 1,000억 달러(2022년 5월 말 기준 790억 달러), 베트남 투자 한국 기업 수 1만 개(2022년 5월 말 기준 9,288개) 달성이 유력하여, 'Triple Magic Number' 달성이 예상된다. 양국은 2030년까지 1500억 달러를 교역 목표로 하고 있다. 수교 당시와 비교하면 300배나 증가한 액수가 된다. 베트남은 한국의 3대 교역 국가이며, 2022년도 432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기록하여 최대 무역 흑자국이다. 베트남은 2021년도에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채택하였고, 현재 53개 대학에 한국어 관련 학과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54,000여 명의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 같은 결과는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서로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혈연적인 유사성이 있어 생산적인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베트남민족과의 교류는 고려 시대(918-1392)에 베트남 리(Ly:李) 왕조의 왕자 2명이 각기 다른 시기에 한반도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각각 한국의 정선(旌善)이씨와 화산(花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때는 문익점(1328-1398년) 선생이 1363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익점의 재능을 아까워한 원나라 대신들이 간청하여 사형을 겨우 면하고 3년간 교지(Giao Chỉ)로 귀양을 갔었다. 1367년 2월에 귀양에서 풀려 귀국하면서 교지(Giao Chỉ)에서 가지고 온 목화 씨앗이 한민족 복식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일은 두 민족의 우호 협력관계 발전을 견인할 자양분으로써의 가치가 높다. 논농사를 지어 쌀을 주식으로 하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국과 베트남은 4가지 면에서 4촌 관계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신적인 4촌, 둘째는 지리적인 4촌, 셋째는 역사적인 4촌, 넷째는 혈연적인 4촌이다. 정신적인 4촌이라는 것은,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권에 속해있고, 관혼상제의 전통적인 의례가 우리와 같다. 이는  두 민족 모두 중국 의례서인 “주례(朱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3권의 책을 근간으로 하여 의례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민족은 고려 광종 때인 958년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관리를 선발하였고, 베트남은 1075년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프랑스 식민시대인 1919년에 폐지되기까지 과거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런 연유로 정신적인 뿌리가 우리와 같다.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 사람들이 서로의 생활문화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리적인 4촌이라는 것은, 한반도와 베트남의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국토의 모양이 영어의 S자 형태와 비슷하다. 양국이 모두 중국과 동으로, 남으로 각각 연접해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베트남도 이웃 국가들과 동해상의 호앙사 제도와 쯔엉사 제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있다.


 동해를 일본은 ‘일본해’로, 베트남의 동쪽 바다를 베트남은 ‘동해’, 중국은 ‘남중국해’로 주장하는 것도 한국과 유사하여 지리적인 4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4촌이라는 것은, 두 민족 모두 반만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 온 역사도 같다. 프랑스로부터 78년간(1862-1940)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 남북 분단의 역사도 같다.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민족 전통문화를 간직하면서 독립 국가를 유지해온 강인한 민족성이 같아 역사적인 4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혈연적인 4촌이라는 것은,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베트남 민족이 한반도에 내린 혈연의 뿌리가 있고, 한민족이 베트남에 내린 혈연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베트남 조상은 3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12세기에 정선(旌善) 이씨 시조가 된 리즈엉꼰(李陽焜)왕자의 망명사건이다. 베트남 리(李) 왕조(A.D1009-1225) 제4대 인종은 56년간 재위하는 동안 1075년 베트남 최초로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1076년 국자감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송나라가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에 인종은 리트엉끼엣 장군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면으로 선제공격하도록 하여 광뚱성, 광시성을 점령하고 수천의 포로와 다량의 전리품을 빼앗아 귀환하였다. 이 같은 업적을 남긴 인종이 56년간의 재위 끝에    적자(嫡子)없이 세상을 떠나자 양자로 들어온 왕자들이 왕위 계승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난국을 피해 고려로 망명해 온 분이 정선(旌善)이씨의 시조가 된 리즈엉꼰(李陽焜) 왕자이다. 둘째로 13세기에 화산(花山)이씨 시조가 된 리롱뜨엉(李龍祥) 왕자의 망명 사건이다. 리 왕조 말 6대 영종(1138-1175)이 3살에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7대 고종(1176-1210) 역시 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충신 또히엔타인(蘇憲誠)이 생존해 있을 때는 어린 왕을 잘 보필하여 정치가 안정되었으나, 또히엔타인이 사망하자 간신배가 득세하였다. 고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궁궐에서 자주 연회를 열어 재정은 파탄되었다. 관리는 부패하여 농민 수탈이 극심해져 결국 민란이 발생하였다. 국난을 피해 지방 세력가 쩐리(陳李)의 집에 피신한 태자는 쩐리의 딸과 결혼하였고, 쩐리는 사병을 이끌고 민란을 진압하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한 고종과 자기 집에 머물고 있던 태자를 환궁시켰다. 1년 후 고종이 병사하자 16세의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혜종은 병으로 3년 만에 7세의 둘째 딸 펏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실권자인 쩐리의 4촌 동생 쩐투도는 왕권을 빼앗기 위하여 8세의 당질 쩐까인(Trần Cảnh:陣煚)과 결혼시키고, 어린 여왕에게 남편인 쩐까인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리 왕조는 망하고, 쩐(陳)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에, 6대 영종의 아들 리롱뜨엉(李龍祥) 왕자는 남송과 금나라를 거쳐 1226년에 고려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옹진군 지역에 침략해 오는 원(元)나라 군사를 막아 내었다. 이에, 고종은 리롱뜨엉 왕자에게 ‘화산군(花山君)’이라는 칭호와 함께 30리의 토지와 2,000명의 백성을 하사하여 조상을 모시며 살게 하였다. 리롱뜨엉 왕자는 한국의 화산(花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북 봉화군에는 임진왜란 때 18세의 나이로 ‘문경(聞慶)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화산이씨 13세손 이장발(李長發:1574-1592)을 기리기 위해 1750년경에 건립한 충효당(忠孝堂)이 있다. 셋째는 14세기에 고려를 방문한 막딘찌 후손에 대한 기록이다. 막딘찌(Mạc Đĩnh Chi:莫挺之, 1272-1346)는 1308년 쩐(陳) 왕조(1225-1400) 명종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경에서 만난 고려국 사신의 초청으로 개성을 방문하여 자손을 남겼다는 기록이 “대월사기전서”에 있다. 막딘찌가 고려에 4개월 머물렀었고, 고려 사신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베트남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고려로 와서 모두 2남 1녀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한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에는 한민족 혈연의 뿌리가 있다. 베트남에 있는 한민족 혈연의 뿌리는 20세기에 들어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이주하였다가 베트남에 정착하였거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징용되어 베트남으로 갔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돌아올 배편을 마련해 주지 않아, 베트남에 정착하게 되면서 후손이 생긴 것이다. 또 하나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베트남에 진출한 기술자들과 베트남 여인들 사이에서 탄생한 후손들이다. 이들이 소위 ‘라이 다이한’이라고 하는 한국인 2세들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우리와 혈연적 4촌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가 되었고, 한국과 베트남에는 약 8만 가구의 한‧베 다문화가정이 있다.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중국 연경에서 사신들의 교류가 있었다. 두 민족 사신들의 최초 만남은 1460년 레왕조의 양여곡(Lương Như Hộc)과 조선의 사신 서거정(徐居正)의    만남이었다. 그 이후 1870년 범희량(Phạm Hy Lượng)과 이용숙(李用肅)이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총 16회에 걸쳐 126편의 시와 17편의 글이 전해지고 있다. 시대별로 보면 15세기에는 1460년 서거정(徐居正)과 레 왕조의 양여곡이 최초로 만난 이후, 1480년과 연도 미상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사신들의 교류가 있었다. 16세기에는 베트남 레(黎) 왕조의 빙극관(Phùng Khắc Khoan, 馮克寬:1528–1613)이 1596년과 1597년 명나라 연경을 방문하여 조선의 사신으로 온 이수광(1563-1628)을 만나 필담을 나눈 기록이 있다. 이들이 만나 주고받은 39편의 시와 글 9편 등 총 48편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古云四海皆兄弟: 예로부터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 했으니,
相濟同舟出共車: 한 배로 강을 건너고, 수레에 함께 오르리라.

 선조들이 만나 주고받은,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는 말은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 협력관계 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17세기에도 몇 차례 접촉이 있었다. 첫째는 조완벽(趙完璧)의 안남 왕래이다. 진주 출신의 선비 조완벽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경도(京都)로 잡혀갔다. 조완벽은 일본상인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1604년 이후 3차례나 안남에 가서 생소한 문화와 사물을 견문하였다. 그의 베트남에 대한 소식은 조선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졌다. 여송(呂宋: 필리핀), 유구국(琉球國) 등에도 다녀왔다. 1607년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조완벽의 본국송환을 간청하여 10년 만에 돌아왔다. 조완벽은 문익점에 이어 한민족 일원으로 두 번째로 베트남 땅을 밟은 인물이다. 


 두 번째는 제주도 주민 24명이 베트남 중부의 호이안(Hội An)에 표착한 사건이다. 조선 숙종 때인 1687년 음력 9월에 제주 목사가 진상하는 말 3필을 배에 싣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24명이 31일간이나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안남국 호이안에 도착하였다. 안남국에서는 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식량을 지원하였다. 이들이 1688년 음력 7월에 중국 상선을 타고 귀국한 기록이 숙종실록(1689.3.4.기록)에 있다. 24명의 선원이 태풍으로 안남국에 표착한 뒤 병사한 사람을 제외하고 조선으로 돌아갈 배가 마련될 때까지 베트남에서는 거의 1년간이나 숙식을 제공해 준 것이다. 외교 관계도 없었고,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대에 호이안으로부터 조선 난민의 귀환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추가적인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18세기의 교류에는 레꾸이돈(Lê Quý Đôn, 黎貴惇:1726–1784)과 홍계희(洪啓禧), 조영진(趙榮進), 이휘중(李徽中)의 만남이 있었다. 베트남 봉건시대의 최고의 학자인 레꾸이돈이 1760–1762년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1760년 12월 조선의 사신 홍계희, 조영진, 이휘중을 만났다. 조선의 사신은 붓, 한지, 설화지(雪花紙)와 같은 선물을 주고,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았다. 또한. 1790년 판후이익(潘煇益)과 황병례(黃秉禮), 서호수(徐浩修), 박제가(朴齋家), 이백형(李百亨)의 만남이 있었다. 판후이익은 레(黎) 왕조, 떠이선(西山)왕조, 응우옌(阮) 왕조에 이르기까지 세 왕조에서 봉사한 베트남 외교사의 거장이자 이름 높은 문장가이다.

 1788년 농민 혁명을 일으킨 떠이선(西山) 왕조의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를 없애려고 청나라 6대 황제 건륭(乾隆)은 손사의(孫士毅)로 하여금 1788년 10월 20만 군사를 보내 침략하였다. 응우옌후에 장군은 1789년 구정(음력 1월 5일)을 기해 총공격 청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1790년 2월 말에 있을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잔치에 응우옌후에가 직접 입조해 축하해 줄 것을 청나라가 요청해 왔다. 거부하면 다시 전쟁, 수용하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자신을 대신하여 팜꽁찌(Phạm Công Trị)를 가짜 왕으로 파견하였고, 판후이익(潘煇益:1751–1822)으로 하여금 가짜 왕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판후이익(潘煇益)과 조선의 사신이 만나 교류하였고, 판후이익(潘煇益)은 조선 사신단에 보낸 시에서 조선 사신과의 교분이 향기로운 술맛보다도 좋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한베수교 30주년인 2022년에 발굴하여 232년 만에 빛을 다시 찾았고, 판후이익(潘煇益)의 시를 한국서예가에 부탁하여 서예작품을 만들고, KOVECA가 서예비용을 후원하여 판후이익 서거 2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판(潘)씨 종중에 기증하였다.

居邦分界海東南(거방분계해남동), 사는 곳이 바다로 동과 남으로 떨어져 있으나,
共向明堂遠駕驂(공향명당원가참). 멀리서 수레를 타고 명당(明堂)을 향했네.
文獻夙徵吾道在(문헌숙징오도재),문장에 밝고 유학에 밝은이들 여기에 있으니,
柔懷全仰聖恩覃(유회전앙성은담).깊은 성은에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네.
同風千古衣冠制(동풍천고의관제), 풍속도 같고 천년 의관도 여전한데,
奇遇連朝指掌談(기우련조지장담). 우연히 조선 사신 손잡고 수일간 담론을 하였네.
騷雅擬追馮李舊(소아의추빙이구), 단아한 품격이 옛날의 빙극관과 이 수광을 회상케 하니,
交情勝似飲醇甘(교정승사음순감). 교분을 나눔이 향기로운 술맛보다도 좋구나.

 19세기의 교류는 1819년, 1845년, 1868년, 1870년 모두 4차례에 걸쳐 교류가 있었다. 그 이후 사신들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은 외교권을 빼앗겨 중국에 독자적인 사신 파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베 수교 30주년을 넘어 31주년이 되면서 향후 한국·베트남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논의하고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다. 베트남 4902년(B.C. 2879), 한국 4356년(B.C. 2333) 역사에 응축된 문화를 서로 잘 이해하는 것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승화시켜 나가는 첩경이 될 것이다. 깊은 신뢰와 “온 천하가 모두 형제”라는 한‧베 두 민족의 전통적인 우호 정신을 살린다면,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협력은 판후이익(潘煇益)이 남긴 시처럼 ‘향기로운 술맛’보다도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베 관계는 송무백열(松茂柏悅)처럼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과 같이, 베트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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