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가성비를 의미하는 ‘시성비’가 중요해져
과거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는 데에는 시간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주 두꺼운 책을 진득하게 읽을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고, 3~4시간이나 되는 대작 영화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드라마도 ‘몰아보기’는 할지언정, 시간이 없다며 빠르게 돌려보거나 건너뛰면서 보지는 않았다. 특히 책을 요약해서 본다는 것은 곧 책을 건성으로 보는 것과 동일하게 여겼다. 책이 주는 지식과 통찰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콘텐츠를 소비하고 즐기는 것에서 시간이 정말로 중요해졌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숏폼(short-form) 콘텐츠이다. ‘길이가 짧은 영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2010년대부터 서서히 생겨나더니 2020년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숏’의 기준마저 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10분 정도의 짧은 콘텐츠’를 말했지만, 지금은 최소 15초까지 줄어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틱톡, 유튜브의 숏츠, 인스타그램의 릴스가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단순히 재미와 흥미, 호기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트렌드’가 존재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세상이 무엇을 추구하며 변화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숏폼을 즐기는 것은 한편으로 ‘세상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무엇인가 ‘짧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에 의하면, 현대 도시인들의 걸음걸이는 20년 전보다 10% 정도가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인들의 말하는 속도 역시 더 빨라지기도 했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1920년대 영화의 원샷 길이는 12초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2010년대에는 4초로 줄어들었고, 급기야 2020년대에는 2.8초로 줄어든 것이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현대인들의 강박관념을 보여준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바로 시간의 가성비를 의미하는 ‘시성비’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한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아무리 가치가 있어도 시간이 많이 들면 그 가치가 반감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사람들은 이제 노래를 더 빠른 속도로 듣기도 한다. 원래의 리듬보다 130~150%를 더 빠르게 듣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빨리 듣는 노래가 오히려 인기를 얻고 차트에서 상위를 기록한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아이돌 그룹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라는 노래는 원곡보다 더 빠른 버전으로 해외 팬들의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분초 사회’라는 말이다. 분과 초 단위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화 3조 원 규모, 기업들 더 뛰어들 듯
그렇다면 현대 사회는 왜 이렇게 빨라지고,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디지털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디지털화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큰 변화를 불러왔다. 하나는 보고 즐길 것이 너무나 많이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며, 디지털 자체가 이미 정확성을 전제하고 있어서 시간이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점이다.
일단 과거에는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다. TV나 라디오 작가, 소설가, 영화감독, 기자 등이 콘텐츠를 만드는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취재와 상상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냈으니, 일반 소비자들은 그것이 길고 짧은 것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콘텐츠의 양도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되어 유튜브의 신세계가 열리면서 이제는 누구나 콘텐츠 생산자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볼 것이 너무도 많아진 세상이다. 유튜브에는 1분마다 400시간 분량의 새로운 동영상이 업로드된다. 한 인간이 살면서 이 영상을 다 보고 죽을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틱톡이나, 쇼츠, 릴스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매분 단위로 업로드된다. 물론 자신의 관심 분야만 보겠지만, 수십 개의 구독 채널이 있다면 이 역시 다 볼 수가 없다. 그러니 꼭 봐야만 하는 것, 꼭 보고 싶은 것만 봐야만 하고 그것을 하는 데 있어서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래야만 최대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콘텐츠의 시간 역시 점점 짧아져야 소구력을 지닐 수가 있게 된다.
두 번째로 디지털화는 정확성을 지향한다. 분 단위, 초 단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스 앱과 지하철 앱에는 언제 도착하는지 분 단위까지 정확하다. 네비게이션 역시 몇 분 후에 내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따라서 이제 ‘한두 시간 뒤에 도착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웬 뚱딴지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면박을 줄 정도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시간에 더욱 민감해지고, 그것을 분 단위로까지 따지기 시작했다. 소통의 속도가 빨라진 것도 이에 한몫한다. 이제는 전 세계 어디에 있는지 카톡이나 라인, 텔레그램이 있으면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예전처럼 편지 한 통 보내놓고 그것이 오가기를 여유 있게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다. 그만큼 더 급해졌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어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숏폼 시장은 앞으로도 더 달아오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문가들의 진단에 의하면 오는 2031년 숏폼의 시장 규모는 한화 3조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적지 않은 시장이 열리는 만큼 향후 기업들도 이 콘텐츠 전쟁에 지금보다 더 거세게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객관적인 확대와 트렌드와는 다르게 정말로 이것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느냐의 문제는 별개이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여기에 심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도하게 도파민을 방출하게 되고 집중력을 빼앗아 가서 뇌에 심각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충동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이는 중독증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기업들이 돈을 벌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활에는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점점 더 빨라지는 가속의 시대, 숏폼 콘텐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