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겐 새로운 음식 카테고리
이제 한국의 라면은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있다. 지난 2023년 한국 라면의 수출액은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천억 원) 가까이 되며, 이는 전년 대비 약 25%나 증가한 수치다. 2015년 2억 달러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한국라면은 점점 더 매워지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말은 곧 전 세계가 한국의 매운맛을 함께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왜 자꾸 라면이 계속 매워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에게 인기를 끄냐는 점이다. 매운맛을 둘러싼 의문을 다각도로 조명해 본다.
매운맛도 5가지로 세분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맵다는 신라면이 등장한 것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조사에서도 매울 신(辛)자를 붙일 정도로 맵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것을 제품의 정체성으로 잡았다. 그런데 지금 신라면은 매운 측에도 속하지 않는다. 매운맛을 측정하는 단위를 ‘스코빌 지수(Scoville scale)’라고 부른다. 신라면의 지수는 1,300 정도이다.
다른 라면들이 대체로 550~950 정도이니 분명 신라면은 매운 라면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이도 옛말이 되었다. 핵불닭볶음면은 6,500, 불마왕라면은 1만 4,444, 염라대왕라면은 2만 1,000에 이른다. 먹기 위한 음식인지, 아니면 매운 정도를 실험하는 것이지는 헷갈리게 하는 정도이다.
자극적인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이를 ‘한국 라면’이라고 인식하기 힘들 정도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랜드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열라면’, ‘킹뚜껑’, ‘맵탱’ 등이 이미 그 이름만 들어도 강하고 매운맛이 느껴질 정도이다.
사실 한국은 ‘매운맛의 종주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미나 동남아에서도 매운 음식을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고춧가루, 고추장을 만들어서 각종 면, 국, 탕, 무침, 조림, 찜에 전방위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본양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 볼 때 한국인의 밥상은 흰 쌀밥을 제외하고는 죄다 빨간색으로 보일 정도이다. 심지어 매우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모습에서 외국인들은 경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매운맛이 우리의 오랜 전통은 아니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1950년, 한국 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매운맛이 확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전쟁 이후의 피폐화된 상황, 기아와 가난, 그리고 스트레스가 매운맛에 대한 선호도를 불러왔다는 이야기다.
매운맛은 인체에서 엔돌핀 분비 효과를 만들어 내고 심지어 중독성까지 있기 때문에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마약류로 분비되는 몰핀보다 그 효과가 100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 스트레스에는 ‘즉효’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젊은층이 마라탕을 비롯해서 각종 매운맛을 선호하는 것도 사실은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현재 20~30대 젊은이들은 한국 그 여느 세대보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인간관계, 취업 등에서 극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시적이나마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인들이 매운맛을 선호해 왔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식품 업계에서는 이제는 매운맛을 더욱 세분화해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맵탱’ 브랜드의 경우, 매운맛을 5가지로 분류했다. 화끈한 매움, 칼칼함 매움, 깔끔함 매움, 알싸한 매움, 은은한 매움이 그것이다. 따라서 소비자는 해장이나 기분 전환, 스트레스 해소 등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매운 라면을 선택할 수가 있다.
한국의 매운 라면이 해외 수출량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외국인들도 매운맛을 즐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단순히 매운맛에 끌리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들에게는 ‘새로운 음식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다. 과거부터 스시류의 일본 음식, 튀김과 면이 위주인 중국 음식에 이어 베트남과 태국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여기에 등장한 한국 음식이 ‘매운맛’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들은 한층 옅어진 아시아 음식에 대한 거부감 가운데, 한국의 매운맛에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는 이야기다.
외국인에겐 새로운 음식 카테고리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매운 라면은 온라인 콘텐츠의 특성을 잘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종 숏폼 콘텐츠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챌린지’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매움 그 자체는 물론이고, 시뻘건 색깔은 그들의 눈을 자극하고 또 라면을 먹은 뒤의 상쾌함이 온라인 세상을 강타했다고 볼 수 있다. 해외 유명인들의 이러한 ‘매운 라면 챌리지’는 이미 10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나 배우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으니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 ‘한국’이라는 브랜드도 큰 추진력이 된다. 각종 뮤직 비디오, 드라마, 영화에서 한국 배우들이 라면을 즐겨 먹는 모습에서 그들은 큰 흥미를 느꼈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예능에 출연한 BTS가 라면을 먹는 모습은 외국인들의 식욕을 크게 자극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매운 라면의 스트레스 해소 효과는 외국인들에게도 동일하다. 전 세계적인 펜데믹 사태와 각종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에 한국 라면은 그야말로 딱이다. 또 경제난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해 구매력이 떨어진 해외 소비자들에게 값싼 라면은 한 끼를 해결하기에는 제격인 음식이 된다. 결국 K-컬쳐, 소셜 미디어, 가격 경쟁력, 스트레스 해소 등 다방면의 요인이 합쳐져서 이제 라면은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최근에 라면의 맛은 더욱 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는 아주 매운 맛이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는 건강함을 표방한 비건 라면이 출시되고 있다. ‘야채라면’의 경우, 7가지 채소를 배합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선보이고 있으며 ‘채황’은 무려 10가지의 채소를 사용하고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감칠맛을 선보이고 있다. 이 제품은 심지어 영국비건협회에 정식 제품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또한 ‘쇠고기 미역국’, ‘북엇국 라면’ 등은 한국의 다른 음식과 결합되어 선보인 제품으로 외국인들에게도 매우 신선한 제품으로 다가가고 있다. 무엇보다 라면은 다양한 조합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재미도 있다. 계란, 콩나물, 버섯 등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을 라면에 넣으면 누구나 ‘나만의 라면’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매운맛은 점점 더 세계인들에게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라면을 시작으로 매운맛에 익숙해진 외국인들은 또 다른 매운맛을 지닌 한식을 찾고, 익숙해지고, 이후에는 중독으로 인해서 점점 더 선호하게 된다. 이는 매운맛의 종주국인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 경제가 한순간에 좋아질 리는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하게 매운맛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