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9:06 (화)
[칼럼] 역사왜곡은 당쟁에서 싹튼다.
[칼럼] 역사왜곡은 당쟁에서 싹튼다.
  • 정하연
  • 승인 2020.08.17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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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조영환

역사왜곡은 당쟁에서 싹튼다.

수필가 조영환 (사진= 시사뉴스매거진)
수필가 조영환 (사진= 시사뉴스매거진)

 

500년의 조선시대 흑백논리 정치역사, 당파간의 싸움이 매우 잦은 시대였다. 당쟁의 시작은 보통 임진왜란 직전 선조가 통치하던 때로 잡고 있는데, 이조전랑 자리에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대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이조전랑의 후보에는 김효원과 심충겸 두 사람이 올랐다. 김효원과 심충겸은 둘 다 한양에 살고 있었는데, 김효원의 집은 동쪽에 있는 건천동 이었고 심충겸의 집은 서쪽에 있는 정릉동이었다. 그래서 김효원 지지자들은 동인이라 부르고 심충겸 지지자들을 서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후에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싸웠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웠다. 또 남인은 다시 청남과 탁남으로 갈라졌고,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졌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당파가 생겨났는데, 그중 가장 컸던 세력은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이고, 이 네 당파를 가리켜 조선시대 사색당파라고 불렀다.

당쟁의 첫 희생자는 소현세자였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을 인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암살을 당했다는 의견이지배적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청나라 왕을 향해 세 번 절을 하는 신하의 예를 하고 왕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조는 항복의 뜻으로 아들 소현세자를 볼모로 청나라에 보내졌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8년 동안 머물게 되는데, 머무는 동안청나라가 받아들인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소개해 주고 서양의 천문학 책 등을 왕에게 선물하며 자기가 새롭게 알게 된 학문과 사상을 알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호란을 막 끝낸 상태여서 청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적대감이 강했고, 또 조정을 지배하고 있던 당파가 친명배청을 주장하는 서인들이었기 때문에 소현세자는 조정과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중립정책을 펴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친명정책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에게 소현세자는 위험인물 이었다. 서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오른 인조도 서인들의 압력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왕 앞에서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하던 소현세자에게 인조는 벼루를 던졌고, 벼루를 맞은 소현세자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죽고 말았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죽을 때 귀와 눈에서 피가 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죽음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마 서인들의 독살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사람, 당쟁의 희생자로 사도세자를 들 수 있다. "아버님, 살려주시옵소서." 사도세자는 뒤뜰에서 뒤주를 잡은 채 아버지 영조에게 애원을 했다. 영조의 손자로 후에 정조가 된 10살짜리 세손도 할아버지를 부여잡고 애원을 한다. "할아버님, 아버지를 살려주시옵소서."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직접 못을 박고는 밧줄로 꽁꽁 묶었다. 무더운 여름 날 8일 동안이나 뒤주에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사도세자는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정신병이 있던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의 눈 밖에 나서 죽음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 죽음의 이유는 당쟁과 관련이 깊었다. 영조 당시 권력은 노론이 거머쥐고 있었으며, 소론과 긴박한 대치를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사도세자는 소론과 가까운 사이였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하루아침에 세력을 잃어버릴 것이 두려웠던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평소에도 사도세자의 여러 가지 행실을 악평하며 왕이 세자에 대한 불신을 갖도록 모략을 꾸몄다. 결국 노론의 계략으로 세자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갖게 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놀아 넣는 것으로 분을 갚았다.

 당쟁의 또 다른 해악은 역사의 왜곡이다. 당쟁에서 이긴 자들은 후대에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건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했다. 조선 숙종의 부인이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그 좋은 예다. 
일반적으로 장희빈을 악한 여자로 비난하고 인현왕후는 후덕한 여자로 칭찬하였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역사는 항상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 기록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는 항상 왜곡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인물을 살펴보면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살던 시대는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인현왕후는 서인들이 지지했고 장희빈은 남인들이 지지를 했다. 서인과 남인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숙종은 한 번은 서인을 두둔하고 한 번은 남인을 두둔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 두 권력 가운데 왕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모색한 것이다.
숙종이 서인 편에 섰을 때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었고, 숙종이 남인 편에 섰을 때는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끌어오던 당쟁이 결국 서인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인이 무너지자 장희빈은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했고, 결국 요사스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사약을 마시고 말았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운명은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숙종의 줄타기 아래 극적으로 바뀌었다. 당쟁에서 이긴 서인들이 자기편이었던 인현왕후를 어진 왕비로, 반대로 남인 편이었던 장희빈을 요사스러운 후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실에 상관없이 역사는 항상 승리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는 법이니까.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작은 산과 계곡들 그리고 잃어버린 길이 보인다. 그래서 '산에서 길을 잃거든 봉우리로 올라가라' 는 말이 있다. 흑백논리는 적을 만드는 나뿐 사고 중 하나이다. 세상에 절대적 옳은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속임수나 공공의 악을 조장하는 것만 아니라면 모든 것은 옳다. 그 예로 역사를 배우면 현재 귀에 들리는 잡다한 소리를 정리하고 사고의 균형 감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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