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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호치민 주석, 인간에서 신화로! ‘적들도 존경했던 호아저씨’
[칼럼]호치민 주석, 인간에서 신화로! ‘적들도 존경했던 호아저씨’
  • 최규엽
  • 승인 2021.01.07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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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코베카 최규엽 상임고문
코베카 최규엽 상임고문
코베카 최규엽 상임고문

호치민 주석은 공교롭게도 베트남 공화국 출범을 선포했던 날인 1969년 9월 2일 오전 9시 47분에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와 결혼한 그였기에 베트남공화국을 건립한 날에 서거했는지도 모른다.
호치민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베트남 인민들은 친부모 상 보다 더한 슬픔을 나타냈고, 민족상잔의 전쟁으로 적이 되어버린 18도선 이남의 사이공 시민들도 호치민 주석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면적인 철시를 감행했으며, 수 많은 주민들이 몰래 모여서 호치민 주석 추도식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이공정부의 요인 일부도 호치민 주석을 추모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노이는 121개 국가로부터 2만 2천통의 조문 메시지를 받았다. 인도에서는 “그의 소박한 태도와 높은 도덕성에 주목하며 인민의 정수이며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인내와 투쟁의 화신”이라고 했고, 우루과이의 한 신문에서는 “그는 우주 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 자체였다”고 썼다. 그렇다 ! 호치민 주석은 전세계 어느 지도자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유머와 소박함과 검소함, 진실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 철저한 금욕주의자로서 인간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성자 같은 삶을 그는 살았던 것이다. 

民不信 無立
그는 옛 프랑스 총독의 관저를 주석궁으로 해서 거주하기를 원했던 당의 간절한 요구를 끝까지 물리치고, 총독관저의 정원사가 살았던 초라한 집에서 폐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니며 책 몇 권만 남긴 無所有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유언에서 자신을 위해서 동상을 만들지 말고, 무덤도 만들어서는 안되며 화장을 해서 그 재를 베트남 북부, 중부, 남부에 뿌리라고 했다. 
생전에 자신의 생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하자는 당의 권고를 그는 반대하고 그런 예산이 있다면 인민들의 생활을 위해서 써야한다고 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사들에 의해서 함락되자 베트남 인민들은 맨 먼저 호치민 만세를 외쳤다. 베트남의 모든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호치민은 항상 베트남 인민들의 단결의 중심이었다. 
그는 모든 권력은 인민들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3 꿍 정신인 함께 산다 ! 함께 먹는다 ! 함께 일한다를 以身作則의 자세로 실천했다.  인민들 속에 들어가 인민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결코 인민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권력을 자신의 안일과 영달을 위해서 손톱만큼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주석으로 있을 때 베트남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던 형님과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는 조문을 가지 못했다. 1초 1분 한 순간이라도 사사로운 정에 메이지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인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다. 
1940년대 일본군의 가혹한 제국주의 통치로 베트남 인민들 2 백만명이 아사하고 있을 때 호치민은 전인민들에게 2 주에 한끼 굶어 동포를 돕자고 호소하면서 본인은 사흘에 한끼를 굶었다고 한다. 그의 종교적 수행자 같은 삶은 당시 종군작가였던 썬퉁에게 직접 써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실감할 수 있다. “혁명은 우선 따뜻한 가슴으로 해야 한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엄숙하게 검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우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에 조직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인민대중을 감흥 시킬 수 있다.
이처럼 호치민은 자칫 냉혹하기 쉬운 마르크스- 레닌이론을 공자의 인덕정치로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를 ‘반은 레닌이요, 반은 간디’라고 불렀다. 또한 평생 공자를 존경했던 호치민은 소련의 코민테른 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유학자나 수도자처럼 비추었다고 한다.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위대한 영웅, 위대한 교양인, 위대한 인격자
호아저씨가 서거하자 미국의 워싱턴 타임지는 ‘현재 살아있는 어느 민족주의 지도자도 불굴의 정신으로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수 많은 제 3세계 국가들이 서구제국주의 식민지 침탈에 맞서 싸웠지만 베트남처럼 두 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서 승리한 역사는 없을 것이다.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전세계를 알고 배우는 여행을 시작한다’ 호치민은 반프랑스 독립운동의 중심지었으며 역사 속에서 침략자들에게 가장 앞장서서 저항했던 베트남 중부지역에 위치한 응에 안성의 중심인 남단부 안의 촌락인 킴리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엔 신삭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프랑스 식민지 정부의 고위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후학 양성하며 독립운동 하고 있는 친구들과 교유하며 반프랑스 저항운동을 돕곤 했다. 호치민 누이 타인은 프랑스 군대에서 무기를 훔쳐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전달했다해서 감옥을 살았고 그 후도 독립운동으로 몇 번의 감옥을 살았다. 그녀는 1945년 8월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신문에서 그동안 가명을 수 십개 썼던 동생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오리 두 마리와 달걀 스무개를 선물로 가지고 동생을 만나고 나서 죽을 때까지 동생을 찾아가지 않았고 호치민도 누님의 장례식에 참석을 못한다. 형 키엠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프랑스와 싸웠고 오랜 기간 감옥을 살아야 했다. 이처럼 응우엔 꿍은(호치민)은 온 가족과 지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프랑스에 대한 저항정신과 애국심을 배워나갔다.
그는 닥치는 대로 독서에 열중했고 프랑스어와 중국어도 익혔다. 그는 그 후 세계를 다니며 7 개국어를 습득하게 된다. 반프랑스 시위에 가담한 것으로 퇴학을 당한 그는 아버지와 상의해서 프랑스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 후 호치민은 동양의 한계와 서양의 저력을 깨닫기 위한 고난에 찬 배움과 투쟁의 길을 겪는다. 프랑스로 가는 기선에서 화부 보조일을 하면서 04시 기상해서 밤 9시까지 고된 노동을 한다. 그는 그 후 프랑스에서는 사진현상 작업, 영국에서는 청소부, 미국에서는 하인으로서 항상 밑바닥에서 노동하는 삶을 하면서 아프리카, 남미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세계를 공부하고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행동한다.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운동에 가담하고, 영국에서는 마르크스의 손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해외노동조합연합의 조직원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는 결국 프랑스 제국주의 본거지인 파리에 정착,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름을 응우엔 아이쿠옥(애국)으로 바꾸고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에 가입하고 1919년에는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한다. 
김규식 등 조선의 애국자들과 함께 1차대전 후 국제질서를 논의했던 베르사이유 국제회의에 베트남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남민족의 요구’를 제안한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어도 항상 베트남 독립을 잊어본적이 없었다.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에 싸우지 않은 공산당 내에 프랑스 사람들과 그는 끊임없이 논쟁하고 싸웠다. 그가 러시아로 가서 레닌을 만나고 코민테른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도 베트남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사회주의 세력 내에는 식민지 독립운동을 경시하고 계급해방을 중심으로 싸우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호치민은 민족해방 없는 인간해방은 승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코민테른 활동 시에도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한다.

두 개의 제국주의를 물리 친 호치민
30 여년의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1941년 베트남 북부 지역의 팍보동굴에 잠입한 호치민은 1930년 건설한 베트남 공산당에 이어서 독립운동 전선체로서 베트남독립동맹을 창건하고 본격적인 반프랑스 투쟁에 돌입한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베트남을 침공하고 프랑스군을 진압한다. 이 때 호치민은 중국·미국과 협력해서 일본군과 싸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베트남 전역을 베트민 군대가 장악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났으나 포츠담회담에서 베트남 북부는 장개석 군대가 남부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점령하도록 한다. 그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일부와 결합한 중국군이 주적이라고 생각하고 프랑스와 협력을 모색하고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를 단행한다. ”평생 중국의 똥을 먹는 것 보다 잠깐 프랑스의 똥을 맛보는 굴욕이 낫다는 유명한 말을 한다.“ 당시 많은 동지들과 인민들이 그를 배신자라고 비판할 때 그는 ‘以不變萬不變 ’ 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프랑스와 굴욕적 타협을 한다. 그러나 결국 베트남 인민들은 호치민의 진정어린 호소를 받아들이고 호치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중국군이 물러나고 프랑스 군이 남은 상태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가 계속 옥죄어오자 호치민은 전국의 국민들에게 프랑스와 전면전을 벌일 것을 호소한다. 결국 베트민 군대는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전멸시키고 승리하게 된다. 
이제 베트남은 드디어 독립을 달성하고 통일을 이루는 줄 알았으나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을 빌미로 최강국 미군이 베트남 남부로 입성한다. 1968년 통킹만 작전을 조작한 미군은 월맹에 북폭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베트남 남부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군대’와 북부 월남의 군대는 미군과 2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대에 완전히 장악되면서 베트남은 통일된 독립국가를 완성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기계 보다도 강하다
호치민은 “우리는 모든 면에서 미국의 최신식 강력한 무기 보다도 더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트남 인민들의 민족주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10명 죽으면 미군은 1명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이고 우리 땅에서 먼저 없어지는 것은 미군일 것이다,”
 “미군의 신식 무기들은 밀림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호랑이는 낮에는 밀림에 숨고 밤에 나타나 코끼리의 등에 타고 코끼리의 가슴을 찢어놓고 밀림으로 사라질 것이다.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라고 했고,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미국의 무기가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베트남 인민은 호치민 이름 아래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고 그들의 선조들이 세계를 제패한 몽고군을 세차례나 물리쳤듯이 강한 민족주의 정신으로 남녀노소가 철통같이 뭉쳐서 민족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공군은 B –52 전폭기를 주축으로 12만번이나 전략폭격을 감행했다. 천인공노할 미 라이 학살 등을 자행했고, 전투를 방해하는 밀림을 말살하려고 고엽제를 75만 kl나 베트남 전역에 살포했다. 고엽제 후유증은 3세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고통이 심각했다. 미군에 의한 베트남 전쟁은 집단대학살이었고, 환경파괴와 생물파괴 전쟁이었다.
미군이 5 만명 사망했고, 북남베트남 군대는 150여만명 사망했다한다. 한국군도 5천명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을 기획하고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1995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는 잘못했고, 끔직하게 잘못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이런 잘못을 왜 저질렀는지 설명할 빚을 안고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미국과의 적개심은 없다
베트남의 한 시인은 말한다. “미국과의 적개심은 싸울 때 뿐이고 지금 우리에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없습니다. 승전국으로서 베트남 민족의 특성인 현실주의적 태도와 용서하는 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과 한국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반성해야 할 것이고 항상 베트남 인민들에게 빛진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일 것이다.
이제 베트남과 한국은 수교 27주년 동안 특히 경제협력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역사와 문화적 경험이 비슷한 민족들이기에 앞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리라 믿는다. 그 과정에서  코베카도 그동안 쌓아 온 경험을 토대로 한국과 베트남의 상호 협력과 발전을 위해서 헌신적인 자세로 자기 몫을 다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는 민족통일을 이룩한 베트남 인민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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