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위정자는 거지같았다
내가 철이 들고부터 기억하는 이 나라의 모든 위정자들은 하나같이 거지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나라도 여전히 거지같다.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불렸던 초대 대통령은 본인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조국과 민족을 뒤로하고 이 땅을 침탈한 일본 제국에 빌붙어 개인의 부귀와 영달을 꾀한 친일 부역자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해서 모처럼 싹트던 민족정기를 압살하고, 정적들을 다수 암살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더러운 방법을 모두 동원해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피 끓는 젊은 목숨들을 무수히 거두고 나서야 80 노구를 이끌고 독립운동을 한다고 오래도록 사기를 친 나라로 망명해 그 추한 천수를 다했다. 그래서 그의 삶과 평생은 정말 거지같았다.
사상 유래가 없는 부정선거와 부패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떨쳐 일어난 젊은 학생들의 희생과 헌신을 토대로 출범한 민주당의 장면 총리는 영국식 내각제와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일종의 낭만적 이상주의자다. 그의 꿈과 이상은 분명했으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참혹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 된 국민들의 방만함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제어하지 못했다. 충분한 자유와 권리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며,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곧 혼란과 방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의 시도와 희망은 그 순정함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거지의 꿈과 이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려시대 무신의 난을 일으켜 왕은 물론 문신을 모두 참살한 정중부 이후 처음으로 군사 쿠테타를 감행한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 새재의 산골 마을에서 보통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수석과 차석 졸업생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로 일본 정규 육사에 편입, 졸업한 후 악명 높은 관동군 소위로 부임 불령선인과 독립군을 추포하는 일에 열중했다. 해방 이후 국방경비대에 입대 남로당의 군 프락치로 활동하다가 여·순 군 반란 사건 이후 일제히 시작된 숙군작업으로 입지가 좁아지자 동료들을 밀고하는 대신 자신의 체포를 모면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거지보다 더 남루하고 비열하다.
숙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동료들을 팔아넘기고 문관으로 여전히 군에 남아있던 박정희는 지휘자원이 태부족했던 전쟁의 와중에서 현역에 복귀 승진을 거듭 육군 소장으로 민주당 집권 당시에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그는 산성막걸리를 마시며 오롯이 쿠테타 모의와 준비에 진력했다. 이후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를 감행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국가혁명위원회를 발족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군사반란의 명목상 수반이었던 장도영을 축출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 명실공히 국가의 전권을 장악한 후 이른바 국민의 기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혁명공약을 포고하고 장면 정권이 수립한 국가부흥계획을 차용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발표 빈곤 탈출을 위한 경제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군사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희석하는 한편, 화폐개혁, 고리채 정리, 부정부패 사범 척결 등을 통해 민초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이 모두가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고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저변작업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거지보다 더한 배신과 배덕의화신이다.
민정이양 당시의 약속을 저버리고 3선 개헌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야심차게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고무되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포장한 유신헌법을 제정해 종신집권의 문을 열어 제낀다. 장기집권과 폭압적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자 법률에 의하지 않고 일개 대통령령만으로 주권자인 국민을 체포, 구금, 재판을 통해 사형까지 언도 할 수 있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발령하는 전대미문의 폭정을 감행한다. 이 시기의 그는 녹색사업, 인혁당사건, 대학폐쇄, 언론탄압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다가 이 땅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야수의 심장을 쏘았다는 혁명동지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한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거지의 삶처럼 공과 과를 논할 수 없다.
10.26 사건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그 이후의 행보로 인해 세간에서 최주사라는 야유를 받았지만 그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수재다.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윤제술, 함석헌 등이 있다. 학업을 마친 후 교육계에 남지 않고 만주 정치학원에 입학 만주국에서 고위관료의 길을 걸었던 그가 대통령이 궐위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여러 가지 행태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랄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명운과 국민의 안위를 지켜야할 대통령이 그 책무를 저버리고 12.12 군사 쿠테타를 감행한 신군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끝내 대통령 직마저 이양하고 만 그는 거지보다 더 게으르고 나약했다.
건국 이후 두 번째로 불법 군사 쿠테타를 감행한 전두환은 일찍이 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행진을 주도했을 정도로 정치성향이 강한 군인이었다. 이후 “하나회”라는 불법 사조직을 결성 진급과 보직을 저희끼리 나누며 결속을 다져 기수 별로 조직원을 확보 군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당연히 그가 주도한 쿠테타의 주역들 모두 하나회 출신이다. 이 쿠테타의 특징은 12.12 이후 약 8개월여에 걸쳐 꾸준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군부 독재정권의 출현을 감지한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를 특수부대를 투입 총격을 가함으로써 5.18 민주항쟁을 촉발하고 이후 헬기사격, 무차별 총격 등 5.27까지 미친 피의 제전을 벌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내킨 김에 최규하를 겁박 대통령직을 탈취한 전두환과 군부세력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 간선제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는 한편 삼청교육 등의 사회 정화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숱한 인권유린 행위를 마치 당연한 일처럼 자행한다. 그래서 그는 거지 왕초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하다. 우리 역사에 절대 등장하지 말았어야 할 존재였다.
12.12 쿠테타 당시 9사단장으로 재직하던 노태우는 거사 당일 전두환과의 사전 모의에 따라 철책에서 경계근무 중인 9사단 병력을 빼어내 서울에 진입함으로써 쿠테타군과 대치중이던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제압해 쿠테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 장관과 88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고양한 후 87년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직선제 개헌”수용과“보통사람들”이라는 대중적 캐릭터, “중간평가”를 공약해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이후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참패를 당하자 중간평가 대신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안정시킨다. 30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유·무상 차관을 통해 러시아의 환심을 산 후 북방정책을 표방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권은 무능과 부패, 정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래서 그의 치세는 거지의 구걸행각 보다 더 비루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3당 합당에 동참한 김영삼은 이후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한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그는 제2의 숙군이라는 하나회 척결을 시작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사법처리,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제 실시, 부가가치세 도입, 도농 통합과 지방자치제의 전격 시행을 통해 집권초기 93%라는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으나 준비되지 않은 자본시장 개방으로 금융위기를 초래 IMF 사태를 맞아야 했다. 경제파탄의 책임은 경제 관료들이 져야 마땅했지만 그는 모든 비난을 감수했다. 문민통치를 확립하고 군부의 정치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음습한 우리 사회를 보다 투명하게 만들어 이 나라를 비로소 현대국가로 등업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더없이 축소되거나 간과되었다. 그는 거지보다 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으나 먹고 사는 일에는 거지보다 더 무지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미국으로 유배되었던 김대중은 미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인도주의, 시장경제, 민주주의, 인권 같은 의제가 서구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동양에서는 일찍이 2천 년 전부터 맹자와 묵자에 의해서 널리 설파되어왔다고 일갈함으로써 사뮤얼 헌팅턴, 앤서니 기든스 등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더없는 찬사와 기립박수를 받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3전 4기의 간난 끝에 5.16을 주도했던 김종필과 연대해 대통령에 당선했으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참담했다. 국가 부도 직전의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IMF의 가혹한 긴축재정요구를 수용하고 금모으기운동과 같은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국난을 극복하는 동안 그는 “선비의 정신과 상인의 감각”이라는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중도좌파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유보하기도 한다. 김정일과의 남·북정상회담, 6.15 선언 등을 주도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지혜롭고 자상했으나 거지보다 매몰차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국회의원에 당선 5공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알린 노무현은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민주당에 동참 결기 있는 야권 정치인으로 성장한다. 지역구를 부산에서 서울 종로로 옮겨 당선했으나 지역감정 극복을 표방하며 현역의원직을 내던지고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출마와 낙선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세간의 이목을 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입각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 대선 후보 지지율 4%에서 출발한 그는 전국을 노란 풍선으로 뒤덮으며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지지율이 추락하자 정몽준과 단일화에 성공 그림자 내각까지 꾸렸던 거함 이회창을 침몰시키고 대권을 움켜쥐는데 성공한다. 변화한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선거의 패러다임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원했다. 그때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주권재민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파격과 일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모든 계층 모든 세력이 그의 정책과 수단을 더없이 성급하고 무모하다는 비난을 감수했지만 그가 꿈꾸던 나라, 세상을 바꾸는 일에 실패한다. 그래서 그는 거지보다 불행했다.
경제성장 7%, 개인소득 4000불, 세계 7위 경제 대국 이른바 747 과 한반도 대운하 개통 등 사기성 공약, 청계천 복원과 버스 중앙차로제의 성과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공익과 사익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자원외교를 핑계 삼아 천문학적인 공공재를 낭비하고 그 와중에 사적이익을 추구했다. 실적과 효율만을 내세운 그의 정책은 공기 단축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건설회사의 경영방침과 맞닿아 있었다. 4대강 사업이 바로 그 결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공직은 사익을 추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국회의원, 서울시장 모두 마찬가지였다. BBK 사건과 닥스의 경영실태를 통해 우리는 사익 제일주의자인 이명박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천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이룬 성공신화에 가려져 있던 어두운 그늘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우리의 천박한 욕망의 실체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영어의 몸에서 풀려난 그의 삶은 기실 거지보다 더 탐욕스럽고 사악하다.
박근혜에게 있어 청와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옛집이었다. 온갖 추억과 애환이 깃들어 있지만 타의에 의해 떠나야만 했던 그래서 더욱 그리운 자신의 집, 그녀에게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배신과 배덕에 대한 기억까지 가슴 깊이 묻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견뎌낸 인고의 여정이었다. 한 세대를 넘겨 제집에 돌아오는 일에 성공한 박근혜에게 대통령직은 공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머리를 만지고 외모를 가꾸는 일 이외에는 더이상 할 일이 없었다. 촛불집회와 탄핵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들에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박근혜는 거지보다 더 게으르고 괴팍한 정신질환자였다.
문재인에게 있어 노무현은 같은 꿈을 꾸던 친우이자 동지였고 또한 끝까지 지켜야할 주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무현의 마지막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치욕, 모멸의 실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격했지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친노 인사들은 스스로를 폐족이라 자칭했지만 마치 소신공양 하듯 스스로의 몸을 불태운 노무현의 불꽃 같은 죽음은 그들 모두를 기사회생하도록 했다. 주군의 피를 먹고 되살아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각자도생의 길을 갔고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이 가장 깊었던 문재인은 팔자에 없던 대통령이 되기 위한 길고도 험한 여정에 올라야 했다. 권력에의 의지나 욕망이 부족했던 그는 삶의 가치보다 이념을 우선했던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지원과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우리 헌정사 초유의 촛불시위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다. 그의 꿈과 이상은 드높았으나 그것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에 그는 너무 착하고 무능했으며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의 치세는 열심히 노력했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거지의 삶보다 허망했다.
2. 권력의 본질과 속성
헌법과 법률에 의해 부여된 대통령의 권한은 크게 세 부문으로 나뉜다. 인사권, 사정권, 재정권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은 이 권한을 적절히 행사함으로써 국정을 운영한다. 문제는 이 권한의 적절한 행사 여부에 있다. 적극적으로 행사하면 오만과 독선, 아집에 사로잡힌 독재정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소극적으로 행사하면 직무유기라는 논란에 휩싸여 무능한 정권이라고 낙인을 찍힌다. 이 지점에서 5년 단임제 대통령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역사와의 대화”라는 달콤한 유혹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그 임계점과 시의성, 적절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대통령은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멀어지고 여론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온갖 내밀하고 다양한 고급정보를 독점하는 까닭에 만기친람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면서도 결국은 국민이 자신의 충정을 알아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의 늪에 빠진다. 차기 선거에 대한 부담이 없는 까닭에 국민의 의사와 동떨어진 선택과 결정을 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5년 단임제 대통령의 불행이 시작되는 이유와 까닭이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집권 중반에 이르면 대통령이 변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집권 초기 야심차게 추진했던 개혁의 성과가 미미할 경우 그런 논란은 더 확산 된다. 모든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개혁이란 소수가 다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개혁을 위한 추동력이 소진되기 마련이고 이 지점에서 개혁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은 실패한다. 반면에 혁명은 다수가 소수를 변화시키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두 가지 도착점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절반의 가능성은 주어지는 셈이다. 집권 중반에 도달한 대통령은 흔히 “관료의 늪”에 함몰된다.
관료들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뛰어난 성공이나 실적을 쌓지는 못하지만 큰 실패나 좌절을 초래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현상 유지는 보장한다. 집권 중반에 안정적인 정국운영을 바라는 대통령에게는 익숙하고 편하며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이 편안함에는 그에 못지않은 함정이 있다. 관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변화는 낯설고 번거롭고 서툴수 밖에 없는 새로운 일거리를 안겨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끊임없는 자기증식을 꾀한다. 모든 일을 더욱 세분하고 분산하며 그 일을 담당할 부서와 인력의 확충을 요구한다. 한번 만들어진 기구와 조직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조직은 갈수록 방만하고 비대해진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정된 자원과 역량을 효과적으로 배분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과는 전혀 상반 된다. 그런 눈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이 나라의 행정업무는 20/1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대통령은 행정업무량을 크게 증가시키고 공무원의 수를 늘려왔다. 그것이 관료의 늪에 함몰된 대통령들이 빠진 함정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이런 관점에서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국민이 평안해진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대통령에게 매우 강력하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잘 모르는 권한이 바로 대통령에게 주어진 긴급재정명령권이다. 경제상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초법적 행위로 선조치 후 입법을 통해 법률적 당위성을 부여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면서 발동한 적이 있다. 취임과 동시에 이경식 경제부총리에게 극비리에 준비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경제수석 조차도 발표 시점까지 전혀 몰랐다. 이 조치는 부가가치세 도입과 함께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지하경제의 규모를 축소 시켜 막대한 추가 세원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우리가 중시하는 이념이나 신념까지도 하릴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클린턴의 일갈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민주주의 국가에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경제부문에서 공정과 정의가 실종되었을 때 그 나라는 이미 민주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통령들은 긴급재정명령권을 행사하는데 몹시 인색하고 무지했다. 모든 경제이론과 정책은 선도적 예방조치가 아니라 사후 약방문 격 후속 조치다. 경제 현실 자체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적 현상인 까닭이다.
경제 각 부문에서 발생한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현상의 고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인의 규명과 대안을 마련해 정책으로 확정해서 시행할 때는 이미 경제 현실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이되어버린다. 이런 경우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재정명령권이 부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통령들은 이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의 복리와 민복에 소홀한 국가는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를 등한시하는 정권 담당자는 정말 거지와 같다.
사정권은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철학과 신념을 구현하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국민들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심지어 이 수단은 물리적 힘까지를 동원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제일 강력한 권한이다. 대통령의 사정권을 행사하는 중추적 기관은 바로 검찰이다. 우리나라의 검찰은 직접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강고한 권한을 행사한다. 1992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재직 중에 두 아들을 구속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그 출두 과정이 TV로 생중계되어 외신에 소개되는 치욕적인 공개소환과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투기했다는 모함을 언론에 유포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유명을 달리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고, 역대 모든 안기부장을 형사적으로 소추했으며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유례없는 장기형을 선고 받았다. 1992년 이후 검찰권은 끊임없이 강화되어왔으며 이제 와서는 어떤 제어도 받지 않는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으로 공고해졌다. 제어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독선과 아집, 오만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우리는 검찰을 가리켜 “살아있는 권력에는 알아서 꼬리치는 충견, 사라지는 권력은 가차 없이 물어뜯는 하이에나”라고 비난했다. 검찰은 우리 사회의 모든 선과 악을 자의적으로 재단한다. 그들이 지닌 자尺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강변 한다.
촛불정권이라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 우리는 2019년 9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무려 18개월에 걸쳐 검찰에의해 자행된 쿠테타를 지켜보아야 했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부정하고 무력화시킨 검찰의 사실상의 쿠테타는 이를 방관하고 지켜보기만 한 문재인 대통령의 무능과 나약함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권력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한다. 권력은 비정하다. 자기 손에 오물과 피를 묻히려하지 않는 자는 권력을 장악할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은 당연하게 행사 해야할 권력까지 방기 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제대로 장악하고 행사하는데 어떻게 추·윤 갈등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이미 실패한 개혁과 이루지 못할 꿈을 얘기한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