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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창업 40주년, 대한민국 양복 명장 “이태리, 파리에서 대한민국 양복 제작 기술의 명성을 알릴 것입니다”
[영상] 창업 40주년, 대한민국 양복 명장 “이태리, 파리에서 대한민국 양복 제작 기술의 명성을 알릴 것입니다”
  • 정희
  • 승인 2019.04.15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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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어패럴(주) 정근호 회장
양복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의 필수 의복이다. 지금은 온라인 쇼핑을 통해서도 양복을 구매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양복은 ‘맞춤 양복’이 대세였다. 이는 기성 양복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소재는 물론이고 봉제까지 모든 과정이 차별화되어 있는 것은 물론 포켓의 모양, 트임, 버튼, 색상까지 고객의 취향에 맞출 수 있다. 한마디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양복’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때 명동에는 300여 개의 양복업체가 호황을 이뤘다. 하지만 지금 맞춤 양복을 입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래서 그 많은 업체가 사라지고 지금은 고작 10여 개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라이프어패럴(주) 정근호 회장은 무려 40년간 맞춤 양복을 제작해 온 것은 물론이고 ‘시스템 오더 양복 제작’을 도입했고, 구김이 없는 양복인 ‘크노(CHNO)기술’을 개발하는 등 국내 양복의 역사를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인정한 양복 명장이자 세계 최고의 양복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근호 회장을 만나 우리 양복업계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라이프어패럴(주) 정근호 회장
라이프어패럴(주) 정근호 회장

 

대통령, 유명인, 연예인이 입었던 맞춤 양복
남성 셔츠 및 맞춤 정장 전문업체인 라이프어패럴의 명성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과거 J 대통령, N 대통령의 양복을 전문으로 제작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치고는 라이프어패럴의 양복을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당시 시대를 주름잡던 연예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가히 라이프어패럴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맞춤 양복의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난 1995년에는 경찰복 시제품을 출품해 선정되어 단체복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고 2000년도에는 수출을 확대해서 ‘100만 불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이끈 정근호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희 옷을 입어본 사람은 다른 옷을 입지 못할 정도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개개인의 체형에 딱 맞는 맞춤 양복을 제공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는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양복점들도 엄청난 호황을 누렸습니다. ‘양복점을 열면 돈을 쓸어 담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이죠. 특히 한국인들의 양복 제작 실력은 전 세계에서도 매우 손꼽힙니다. 세계 기능 올림픽에서 무려 12연패를 했으니 전 세계 어느 국가도 우리를 넘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호황을 누리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시대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 맞춤 양복업계도 새로운 비전과 전략으로 또 다른 희망을 꿈꾸어야 할 때입니다.”
정근호 회장이 우리나라 양복 제작의 역사에서 크게 이바지한 것은 두 가지이다. 2005년경부터 ‘시스템 오더(System order) 맞춤 양복’을 정착시킨 것과 주름이 지지 않는 양복을 위한 크노(CHNO)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우선 시스템 오더 맞춤 양복은 과거와는 다르게 컴퓨터에 입력된 300여 가지의 패턴에 자동화된 재단을 통해 기존의 가봉절차를 획기적으로 생략한 기술이다. 과거 모든 작업을 손으로 했던 것을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그 과정을 혁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300여 가지의 패턴은 한국인의 체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가격이다. 기존의 맞춤 양복은 최소 200만 원에서 300만 원까지 하는 고가의 제품이다. 정 회장은 보기에는 이 가격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해지고 맞춤 양복이 사양화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기존의 가격을 28만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낮출 수가 있다. 하지만 업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수작업을 통한 맞춤 양복 제작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양복을 싸게 파는 것은 맞춤 양복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혹은 ‘나의 이름을 그렇게 싸구려 양복에 걸 수 없다’, ‘수익이 너무 줄어든다’라는 이야기했다.
 
맞춤 양복의 새로운 도전
하지만 이러한 반응에 대해 정 회장의 신념은 확고했다.
“맞춤 양복이 사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호황에 대한 추억만 가지고 있다면, 정말로 맞춤 양복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오더 양복을 하게 되면 기성복 시스템과 같이 빠르고 저렴하게 양복을 만들면서도 맞춤 양복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으니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수익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더 열심히 일을 하면 됩니다. 한 벌에 300만 원을 받는 것도 좋지만,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면 28만 원의 양복을 10벌을 만들면 됩니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회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양복 명장들이 하나 둘 동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맞춤 양복 업계는 가격과 납기의 거품을 줄여 새로운 맞춤 양복 시장을 열어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지금 맞춤 양복이 살아남은 것도 바로 이러한 정 회장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더불어 대한민국 양복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 회장이 개발한 ‘크노(CHNO)기술’이다. CHNO란 ‘Crease(주름)+H(수소폭탄)+NO(없다)’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서 형상프레스기를 이용, 어깨선과 허리선 몸통 옆솔기 부분의 이음새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신기술이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주름이 거의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림질을 하더라도 매우 쉽다. 이러한 혁신적인 공법을 통해 정 회장은 프랑스 명품 드레스 셔츠회사 듀퐁(Dupont)과 기술협약을 맺고 대한민국의 양복 기술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크노’라는 기술명은 정 회장의 이름인 ‘근호’와 비슷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당시 크노기술에 우리 전 직원은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첫 양산품이 나올 때 저희 회사는 말 그대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간의 노력에 대한 빛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모두 얼싸안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저의 40년 양복 역사에서 가장 소중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기술로만 45억 원의 매출을 올렸으니 회사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크노 기술
크노 기술
 
어떻게 보면 정 회장은 ‘장사꾼’이라기 보다는 ‘진정한 기술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앞선 시스템 오더 맞춤 양복도 그렇고, 크노 기술 역시 돈만 생각한다면 결코 도전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받던 돈을 10분의 1로 줄이는 것 역시 대단한 모험임에 틀림없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기술에 그렇게 많은 돈과 열정을 쏟아부은 것도 대단한 일이다.
“소비자가 더 싸게, 더 좋은 제품을 구매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저희 양복점에 오는 사람들이 300만 원짜리 양복을 원해도 저는 그걸 권하지 않습니다. 28만 원이면 충분합니다. 뭐하러 그렇게 비싼 돈을 들입니까. 원단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복을 제작하는 공법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고객에게 고마워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객이 비싼 돈을 들이면 내가 돈을 많이 벌기에 내가 고객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반대로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해 고객이 저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사업을 펼치고 싶습니다. 양복 한 벌에 100만 원을 남기면 그 양복을 입는 고객 한 명은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복 한 벌에 5만 원을 남기면 20명의 고객이 행복해집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더 많은 고객의 행복을 위한 사업을 펼쳐나가고 싶습니다.”
 
양복의 미래를 함께할 이종섭 교수
정 회장이 이렇게 고객을 위한 철학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장인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첫 직장은 의류 쪽이 아니었다. 최초에는 한국은행에 입사, 은행원의 길을 걸어갔지만, 양복이 너무 좋아서 인생의 항로를 바꾼 것이다. 그는 서울 토박이로서 명동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나이가 들면서 명동으로 옷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양복을 입은 멋진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양복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것. 더불어 당시에 양복은 매우 귀중한 선물이었다.
“당시에는 양복을 선물하는 것에 하나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 군인이나 직장인들이 승진을 할 때 맞춤 양복 선물권으로 선물을 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귀중한 선물’이라고 하면 바로 ‘맞춤 양복’을 떠올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나니, 부모님과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2년간 공부를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늘날의 라이프어패럴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종섭 교수
이종섭 교수
 
사실 그는 양복업계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간 한국인 2호였다. 그만큼 앞서서 선진기술을 배웠던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양복업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양복 제작기술을 전파하는 것을 생의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함께 일하고 있는 이종섭 팀장(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은 라이프어패럴을 물려받을 후계자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회사에서 일도 하지만 고용노동부 장관이 임명하는 ‘산업현장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전국의 교도소, 학교에 출강하며 맞춤 양복 제작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저는 13살 때부터 양복을 시작해서 9년 만에 제26회 국제기능올림픽 대회 양복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제는 양복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제작기술을 전파하는 것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근호 회장님의 배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교도소 재소자들이 양복을 아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양복 기술이 있으면 사회에 나가서도 취업이 잘 될 수 있어서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맞춤 양복 제작기술을 후대에 전파하고 전수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예정입니다.”
 
대한민국의 맞춤 양복 제작의 역사를 써온 정근호 회장에게는 이제 남은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크노 기술이 이태리와 파리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그는 “이태리에 샤넬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크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이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싸고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의식주(衣食住)’는 인간 생활의 3대 기본 조건이다. 그런 만큼 의(衣)에 해당하는 양복 역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정 회장의 노력이 또 다른 패러다임 변화의 기폭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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