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삼성은 대한민국의 대명사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삼성은 대한민국의 대명사
  • 유미라
  • 승인 2020.11.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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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

 

지난달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는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이 회장이 ‘혁신과 도전’으로 우리도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심어준 데 대한 교훈을 되새기는 대목이다.  이 회장이 1997년에 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는 책 제목처럼 요즈음같이 버티기 힘들고 우울한 세상엔 국민들 가슴에 한번쯤 되새기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최근에 많은 언론에서 삼성 故 이 회장을 특집으로 다뤘다. 정치의 힘을 이용해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로 사회악을 만들었고 무(無)노조 경영 등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며 이 회장을 부정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결과창출을 남기고 떠난 이회장임에는 틀림없는 현실이다. 여권 정치인들은 이 회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기해 지금 추진 중인 기업규제 3법 등을 정당하게 치부할지는 모르지만, 작금의 현실은 해외에서 대한민국은 몰라도 삼성은 알정도의 글로벌 애국기업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요즈음 같이 극심한 취업난 등으로 힘들게 버티고 있는 청년들에겐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인들보다는 세계에 글로벌기업으로서의 자부심을 현실로 증명해준 故 이 회장이 더욱 더 빛이 바라는 이유이다.
어떤 이유든 대기업들의 경제적 영향으로 국가는 돌아가고 있다. 그동안 반기업 분위기로 불신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선 한번쯤 삼성의 존재가치에 대해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할 듯 싶다. 일자리 창출, 국고에 기여하는 납세, 일류기업으로서 국민들의 자부심과 자긍심, 진정한 애국기업의 조건을 다 갖춘 삼성에 대해서 고개를 숙여야 할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들의 사회공헌에도 불구하고 온갖 규제와 입법을 밀어붙이는 정치적 재고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이건희 회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3남5녀 중 일곱째였다. 세 살 때까지는 경남 의령의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 회장이 어린 시절 부친인 이 창업주를 만나는 것은 많아야 1년에 한두 번이었다.
이 회장은 어린 시절 대부분 혼자 지냈다. 여섯 살이 돼서야 온 가족이 서울 혜화동에 모여 살게 됐다. 1947년 5월 이 창업주가 사업을 확장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고, 이 회장은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마산, 대구, 부산 등으로 피란을 다녔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다. 가족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회장은 J언론의 인터뷰에서 “친구도 없고, 놀아줄 상대가 없으니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민감한 나이에 민족 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어린시절을 회상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내성적인 학생으로 통했다. 하지만 한번 말을 꺼내면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 이따금 주변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고독 속에서 무언가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습관도 몸에 배어있었다. 일본 유학 3년간 이 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영화관에서 보내 유학 생활 동안 본 영화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무언가에 꽂히면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파고드는 날이 많았다. 대학 때 다시 일본으로 가 와세다대에 다닐 땐 당시 세계 최고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텔레비전, VTR, 카메라,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했다.
이 회장은 고교 시절 주변에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인간 본성에 대해 알려고 자신을 실험한 적도 있다. 그는 한 손을 묶고 24시간을 견딘 뒤 “극복해봐라. 이게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신경영’ 책자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쌓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삼성 인재경영의 바탕이 됐다는 후문이다.
고교 졸업 후 연세대 입학이 확정됐지만 “외국으로 나가라”는 부친의 지시에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다녔다. 1965년 조지워싱턴대 재학 당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맞선을 봤다. 다음해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해 홍 전 관장과 결혼했다. 이 회장은 이 창업주를 따라다니며 직관력과 동물적 경영감각을 익히고 장인인 홍 전 회장으로부터는 사회에 대한 개념과 사회 움직임을 배웠다. 홍 전 회장은 딸인 홍 전 관장에게 “이 서방은 그릇도 큰 데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니까 내가 그냥 쏙쏙 넣어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신뢰감이 오늘날 삼성그룹 회장이 되는 발판이 됐다. 
이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에 올랐다. 후계자로 낙점된 뒤에도 이 회장은 늘 말을 아꼈다. 그저 이 창업주 뒤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여러 기록과 사진에도 이 회장은 이 창업주 뒤에 말없이 서 있다. 창업주인 부친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반증도 된다. 1987년 이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회장은 45세의 나이에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취임 당시부터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내걸었다. 끊임없이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이건희식 경영철학’을 강조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때는 열두 시간을 쉬지 않고 강연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등으로 유명한 신경영으로 삼성은 변신을 했다.
그로부터 6년 뒤,  1999년 말~2000년 초 폐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완치는 됐지만 이 회장은 겨울이면 기후가 따뜻한 일본이나 하와이 등에서 지내며 건강관리를 해왔다. 2014년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져서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혈관 확장술을 받았다. 이후 최근까지 입원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외로운 항해 이재용 시대 개막
언론에서 지난 정권 때 삼성의 아픔을 재현하기 급급한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은 코로나19와미중 무역분쟁으로 글로벌 위기에다 재판으로 인한 사법부에 대한 무거운 부담을 안았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행보는 경영 활동에 매진할 것으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와 스마트폰이 이 회장이 남긴 업적이라면 첨단 반도체와 AI, 차세대 이동통신 등은 이 부회장이 이끄는 새로운 분야로 보며 본격적으로 경영에 매진할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노사관계 설정과 사회 공헌 등을 통해 꾸준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게 재계 관측이다. 이 부회장은  '무노조 경영' 방침을 폐기하고 자식에게 승계는 안하겠다고 공식화한 바 있다. 이 부회장 중심 지배구조 체제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지만, 관심이 쏠리는 상속과 지배구조 개편 문제 역시 이 부회장의 숙제로 남아있다. 외로운 항해가 될지라도 이재용 부회장의 행보가 순탄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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