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인 패배의 낙인
선거는 꼭 최종적인 당락으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 기간에 보여준 후보자의 모습이 견고한 이미지로 남아서 다음의 정치적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보자는 선거 운동을 ‘열심히’ 하기도 해야 하지만, ‘지혜롭게’ 해야 하기도 한다. 한 번의 선거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의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지난 국민의힘 대표 선거는 원희룡 후보에게는 최악의 선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나름의 소장파 이미지 등 훌륭한 정치적 자산을 가지 고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었지만, 이번 선거 운동 기간에 보여준 그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싸늘하게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기에 선거 이후 원 후보에 대한 다양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 ‘정치적 파산 선고’ 받은 원희룡 후보
이번 전당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원희룡 후보가 받은 표는 대략 19%에 불과했다. 한동훈 후보가 받은 약 63%에 비하면 3분의 1에 불과한 초라한 성적이었다. 이른바 ‘윤심’을 단단히 등에 업고 출마했지만, 초라했던 그의 성적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더 이상 윤심은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또 하나는 ‘정치인 원희룡의 득표력은 상실됐다’라는 점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원 후보의 네거티브 선거에 많은 국민의힘 지지자조차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동훈 후보가 의도적으로 지난 총선에서 패배했다는 음모론은 물론이고, 극우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매우 적극적인 ‘우향우’라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 결과 이번 선거가 끝난 후 한 언론사 논설위원은 그를 향해 ‘정치적으로 파산했다’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비판을 가했다. 지난 7월 2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원희룡 전 장관은 이번에 과도하게 한동훈 후보를 비난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국민에게 샀던 그 좋은 이미지를 완전히 버려 버렸다.
이번에 태도를 보고 어떻게 저렇게 됐나 생각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기지 못할 경선을 하려다 보니 상당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비록 좌파 진영에서 전향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당 소속인 김경률 전 최고위원의 비판은 더욱 심각하다. 그 역시 같은 방송에 출연해 “원 후보에 대해 상당히 괜찮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저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소통해 왔다. 그랬던 사람이 인신공격하고 색깔론을 들고나오면서 공격을 하니 환멸 곱하기 환멸을 느꼈다.
제가 봤을 때 원희룡 후보는 정치권에서 발을 떼는게 맞다. 우리 사회가 올바르다면, 원 후보는 스스로 정치에서 퇴출돼야 한다” 라고 말했다. 김 전 위원장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 사회 가 올바르다면’이라는 멘트이다. 이 말은 곧 원 후보의 행태가 심각하게 비정상적이라는 의미이며, 도저히 용인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오늘날의 비판을 예견하게 하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과거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좌파 성향의 패널과 거칠게 논쟁하면서 막무가내로 쏘아붙이다가 패 널이 퇴장하는 일까지 겪었고 생방송 자체가 중단됐다. 더 나아가 패널이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패널의 좌석을 향해 공격을 이어나갔다. 도저히 상식적인 토론의 자세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장면은 그가 국토교통부 장관직을 수행할 당시 양평 고속도로에 관한 김건희여사의 의혹이 불거지자 갑자기 ‘백지화’를 선언했다. 이 두 가지 장면은 ‘급발진’하는 원희룡 후보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연속적인 패배의 낙인
사실 애초에 급발진은 원희룡의 트레이드 마크가 전혀 아니었다. 그에게는 ‘개혁파’, ‘소장파’, ‘합리적 온건 보수’의 이미지가 강했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실제 그는 대학 시절 한때 공장에 취직해서 노동자로 살아간 적도 있을 정도로 사회의 변화에 관심이 컸다.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생 중에 이런 학생이 있다는 사실은 주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에도 그는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면서 정치를 이어왔고, 심지어 탈당을 해서 제주도지사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던 원희룡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심지어 한때 그는 당의 ‘희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2006년 그가 반대 목소리를 자주 내서 당에서 외면받을 때 손학규 당시 경기지사는 “원희룡 최고위원 같은 생기 있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야당이고 정치냐. 한나라당에도 저런 희망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정치 중심 여의도에서는 너무도 먼지역이다. 거리상으로도 그렇지만, 지역적으로도 그렇다. 계속해서 제주도 지사에만 머물러서는 대권은커녕 국회 의원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심리적인 소외감, 중앙 정치에서 영원히 멀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원희룡 후보의 ‘급발진’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그는 중앙 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실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윤석열 정권이 출발한 이후 그는 거의 완벽하게 ‘윤심의 대변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친윤’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정권이 필요한 곳곳에 스스로 자처해서 나섰고 대통령실과 코드를 맞춰왔다.
애초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출마 자체도 그랬다. 그 누구도 그가 출마할 것이라고 내다보지 않았지만, 그는 대통령실과의 교감 이후에 갑자기 입후보를 선언했고, 과격하게 한동훈 후보를 공격했다. 그 결과 합리적 온건 보수였던 그의 이미지는 ‘목소리만 큰 과격한 보수’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지나치게 윤 대통령과 밀접한 포지셔닝은 그의 ‘소장파’의 이미지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물론 정치인의 행보는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이듯, 정치인의 행보도 때로는 극적으로 변하면 역동적인 태세 전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희룡 전 후보의 정치 생명력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 그가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은 대중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고, 당대표 선거에서도 지면서 ‘연속 패배’의 낙인이 너무 강하게 찍혀 있다.
대체로 국민은 ‘선거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원희룡 후보가 입은 상처는 너무나 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원 후 보는 충성을 다 바쳤다는 이유로 인해서 계속해서 정무직에 올라갈 수 있고,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실제 지난 7월 말 한 정치 평론가는 원 후보가 총리직을 제안 받고 고심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 오르든, 혹은 또 다른 장관직에 오르든 그의 미래 행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윤심’에 의해서 자리를 보전한다면, 언제가 그 ‘윤심’이 사라지는 날에는 자리를 보전하기는 무척 쉽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