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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성공’의 속은 ‘고통’이다
[칼럼]‘성공’의 속은 ‘고통’이다
  • 조영환
  • 승인 2018.09.2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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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다 수긍할 게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말에도 동의하겠지만, 그 대가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열심히 노력하거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수준에만 머무를 뿐, 노력과 돈 이외에 요구되는 대가에 대해선 잘 생각하지 않는다.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는 마크 맨슨의 말이다. 바로 그게 현실이다. 이 말이 너무 과격하다면 성공과 부는 ‘스스로 만든 감옥’과 다를 바 없다는 다음 주장은 어떤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 부자들, 그리고 유명인을 지켜보라. 그들의 성공과 부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대가로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이 치른 대가는 자유다. 그들의 지위는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악수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것과 관련해 나는 자주 애용하는 말이 하나 있다. 작은 동네 슈퍼 주인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하게 밝혀도 문제될 게 없다. 사람들 앞에서 대통령을 욕해도 된다. 그런다고 세무 조사해서 괴롭히지않는다.
 
반면 수많은 대형마트를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 오너나 재벌 총수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간 큰일 난다. 정치적 보복과 사회적 불매운동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자나 깨나 입조심해야 한다. 그 정도 대가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가가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그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론 대가의 목록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건 별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들이 남긴 명언들이 그걸 말해준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이 된다는 건 사형대에 오르는 것”,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화려한 불행”,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고급 노예 생활”, 제8대 대통령 마틴 밴뷰런은 “물러날때가 가장 행복했다”,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백악관은 세계최상의 감옥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몰라서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건 아니며, 오늘날의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가가 크고 많더라도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성공의 축복이 있기에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의외로 그런 평가 과정을 건너뛰고 성공을 무작정 탐하는 사람이 많다. 일부 지식인이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앞 다퉈 ‘고통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강조하면서 “고통을 즐겨라”라고 선동해대니, 비교적 고통 없이 사는 삶의 방식에는 아예 관심을 가질 겨를조차 없다. 고통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에는 흔쾌히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그렇게 미화해도 괜찮은 걸까? 고통은 끔찍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불안과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게 적당한 수준이 아닐까?
 
알프레트 아들러가 잘 지적했듯이, 성공에 대한 야망은 우리 내면의불안을 극복하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야망이 크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면에 더 강한 불안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과시해보임으로써 내면의 콤플렉스를 상쇄하려고 든다. 하지만 성공을 위한 행위와 성공으로 얻는 평판은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엄청난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행위나 처세가 일시적으로 뛰어날 수는 있어도 지속적이기는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성공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니, 어찌 보면 딱하지 않은가.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폄하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건 그 어떤 고통이라도 좋으니 성공 좀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큰 결례다. 다만 우리에게 진리처럼 통용되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를 좀 달리 생각해보고 표현해보자는 것이다. 낙이 왔다고 해서 고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각오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꼭 성공을 하고 싶다면 성공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법도 있다.
 
성공의 정의는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흔한 분류법에 따르자면, 성공엔 ‘외적 성공’과 ‘내적 성공’이 있는데, 우리는 외적 성공만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왜 그래야 하나? 자기 나름의 내적 성공을 이룬 후에 “나는 성공했다”거나 “나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될 게 아닌가.
 
심리학에 밝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이솝 우화』의 ‘여우와 포도’이야기에서 비롯된 이른바 ‘신포도 심리’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포도가 높이 달려 있어 먹을 수 없게 된 여우는 돌아서면서 “어차피 시어서 먹을 수도 없는 데 뭘”이라고 말한다. 어떤 걸 원하지만 그걸 얻을 수 없으면 비난을 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려는 합리화를 한다는 것이다. 이걸 가리켜 ‘신포도 심리’라고 한다.
 
‘성공’의 다른 이름은 ‘고통’이라는 주장은 ‘신포도 심리’와 거리가 멀지만, 설사 그렇게 본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신포도 심리’를 어리석거나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게 정설처럼 굳어졌는데, 그걸 왜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신포도 심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엔 동의하기 어렵다. 합리화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합리화와 그렇지 않은 합리화다. 부도덕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합리화가 무엇이 문제가 된단 말인가. 자기만족을 하더라도 합리화 같은 건 하지 말고 순전히 깊은 깨달음에 의해 그렇게 하는 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도사도 인간일진대 ‘신포도 심리’와 같은 합리화를 넘어설 수 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은 질릴 정도로 많은증거를 제시하면서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기보다는 ‘합리화 하는 존재’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즉, 합리화는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비판하거나 비난해야 할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면책을 위해 하는 합리화일 뿐, 개인 차원에서 자신의 평온을 위해 합리화를 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권장해도 좋을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바람직한 합리화마저 그 정체를 폭로하지 못해 안달하는 걸까? 이렇다 할 정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 평온을누리는 게 못마땅해서 그러는 건가? 반드시 풀고, 그 결과를 널리 알려야 할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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