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인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태동기부터 공직에서, 정당에서, 그리고 사업의 영역 등 진출하는 분야마다 굵직한 성과를 낸 여장부가 있다. 2023년 현재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올곧은 성품과 바른 리더십, 그리고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헌에도 매우 충실한 인물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영동케미칼의 윤영자 회장. 지금도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동중앙교회 권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직책을 통해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다하고 있다. 윤영자 회장을 직접 만나 그녀가 함께 했던 격동의 역사 속의 활동과 인생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강남의 윤영자’, 여성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름 나
그녀를 대표하는 사업은 바로 자체 세제 브랜드인 ‘시스니’이다. 79년 9월 (주)애경 장영신 회장을 통해 국내 유일의 산업용 세제 총판권을 따내 사업을 시작한 이후, 오랫동안 300여 곳과 거래를 했으며 지금도 금속업체, 호텔, 기업뿐만 아니라 농협마트와 한국 까르푸 매장 등에 전량 납품하며 돈독한 신뢰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사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공직 생활에서 정당이라는 조직생활을 거쳤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이질적인 영역이지만, 그녀의 열정 앞에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윤 회장이 했던 최초의 사회생활은 공직이었다. 젊은 나이에 23:1의 압도적인 경쟁률을 뚫고 대한민국 총무처에 합격, 공보부에 발령받았다. 그때 아나운서로서의 교육을 받고 인천시청 공보실에서 시정뉴스를 10년간 진행했다. 이후 서기, 주사, 부녀계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고속 승진을 했다. 그런데 그때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남편(이종면;現 영동교회 은퇴장로)이 서울 경기고로 발령이 나면서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 그때 사표를 낸 후에는 정당의 조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 제3지구당 여성부장을 한 것에 이어 강남, 서초구, 강동, 송파, 성동구의 여성 부장을 지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조직학을 배워 매우 큰 성과를 냈다. 바로 화학공학과 출신의 교수였던 이태섭 씨가 미국에서 돌아왔고 그가 1979년 민주공화당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때 이태섭 씨의 당선을 돕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 그의 이러한 활약은 당시 엘리트 여성들 사이에서 크게 소문이 났다고 한다. ‘기독교 실업인(CBMC)이라는 단체에서 그녀를 스카웃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회장을 했으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해서 사회를 보고 현재는 CBMC중앙회 시니어 클럽에서 활약하고 있다. 당시 상해지회, 잠실지회, 동남지회의 회장을 잇따라 역임했다. 특히 그때 2,000만 원으로 상해지회를 만들어 130명을 모아놓고 찬송을 부르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감격스러운 것은 지난 8월 21일 한국에서 CBMC 세계 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상해회장과 조우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활발한 정치 조직 활동을 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고 드디어 애경을 운영하던 장영신 회장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때 장영신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내인 이순자 여사와 친구였는데, 그때 이순자 여사는 장 회장에게 “강남의 윤영자를 잡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장 회장과 인연이 시작되었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출발은 애경의 제품에 대한 전국 총판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 저는 사업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열정을 가지고 해왔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못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호텔, 금속업체, 각 정부기관, 그리고 섬유업체 60여 곳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에도 수출하면서 정신없이 사업을 확장하는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돈 욕심 없어, 나누는 삶이 최고의 삶
그 후 그녀는 30여년 동안 쌓은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드디어 자사 브랜드인 ‘시스니’라는 연성 세제를 개발해 더욱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시스니 락스’, ‘삼화 락스’ 등을 산업용 세제와 청소용품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또 다른 제품 개발을 통해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왔다. 또 사업 다각화를 위해 기타 화학 첨가제 사업에까지 진출해서 이제는 당당히 화학 산업의 일원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여성 경영인으로서 전 세계 50개국으로 다니면서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놀라운 투혼을 발휘해왔다. 이러한 오랜 시간의 사업과 경영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제일 중요한 것은 양심을 거르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신뢰가 쌓이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더욱 큰 발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모든 것이 다 대인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경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직원들, 그리고 거래처와 함께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신뢰가 싹트고 회사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믿음직한 기업을 이끌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습니다.”
이러한 사업적 행보가 돋보이는 것은 당시 함께 비슷한 영역에서 사업을 했던 업체 중에서 살아남은 곳은 영동케미칼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이미 해당 산업의 주요 거래처였던 섬유업체는 후진국 산업이 되어서 주요 생산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겼고, 호텔 역시 침체를 겪으면서 거래처 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때 경쟁업체들이 LG의 계열사, 동산, 무궁화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은 문을 닫고 영동케미칼만이 살아남았다. 한때는 30여 명의 직원들이 똘똘 뭉쳐서 사업을 영위했었다. 무엇보다 임대 공장이 아닌 자신의 건물, 자신의 공장에서 제조했던 것이 큰 장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윤영자 회장의 삶을 이루는 큰 하나의 축이었다면, 또 하나의 축은 바로 기독교실업인에서의 활동과 신앙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생활이었다. 바쁜 사업의 와중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신앙을 잃지 않았고 이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봉사와 헌신의 메시지를 전파해왔다.
“한국기독실업인회의 활동을 꽤 많이 해왔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를 신념으로 경영하는 이들이 성경에서 경영 마인드를 끌어내자는 취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올바르고 정직하게, 또 투명하게 사업을 하자는 목표가 매우 강했습니다. 특히 즐거움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자신과 직원들을 독려하면 사업의 성공은 물론이거니와 삶에서도 두려운 것이 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 회장은 그 자신이 업무의 시작과 끝을 직원들과의 기도로 마무리해왔으며, 직원들을 사랑으로 배려 한 탓에, 함께 일한 직원들의 평균 근무 기간은 20년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기독교실업인 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에 불려 다니면서 사회를 보고, 조직을 단결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실업인 세계대회를 독일에서 개최했을 때 맥주통위에 올라가 사회를 진행했던 기억이 추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하다. 윤 회장은 이외에도 송파구상공회 부회장, 여성경제위원회 초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또 송파 주민자치 위원장 6년, 행복울타리 회장 4년, 송파구 명예구청장을 3년이나 해왔다.
‘맹물 조합장’이라는 이색적인 별명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그녀에게는 이색적인 별명 하나가 생겼다. 바로 ‘맹물 조합장’이다.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보니 늘 사회공헌을 하는 데에 많은 돈을 썼고 돈을 모으는 인생이 아니라 돈을 퍼주는 인생이었다고 한다. 주변 친척들에게는 땅도 나누어주고 돈도 주다 보니 말 그대로 ‘맹물’과 같은 조합장이라는 의미이다.
“저는 나눔을 인생 최초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한 인생이 얼마나 가치있게 사느냐는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희생하고 나누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많은 활동을 지향하는 것보다는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을 강의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인생을 돕는자가 있어야 산다. 여전히 윤영자 회장에게는 꿈이 있다. 용인에 있는 자신의 땅에다 원두막같은 교회를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외국을 다니면서 작은 예쁜교회를 그려왔다. 그래서 현재 권사역할을 하고 있는 영동중앙교회 자매교회를 하고 싶다고 전했다. 윤 회장의 아버지(윤재희)도 생전에 교회를 지으셨다고 한다.
솔선수범의 리더십와 깨끗하고 양심있는 기업. 그리고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공헌의 삶을 살아온 윤영자 회장. 지금도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한 인간의 힘이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많은 대한민국 여성의 롤모델이며, 모든 국민이 가져야 할 비전과 열정의 표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동케미칼의 시스니 브랜드처럼 세상의 모든이들의 마음까지 씻어주고 닦아주면서 세상에 덕을 쌓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