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2 18:09 (금)
[Column]꼬마 강태공과 아버지 - 석동율 동아일보 국장
[Column]꼬마 강태공과 아버지 - 석동율 동아일보 국장
  • 석동률
  • 승인 2018.03.0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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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였다. 아버지 덕에 나는 아홉 살에 낚시에 입문하여 아버지의 주말낚시 ‘비서’가 됐다.비서의 주 역할은 지렁이사냥. 요즘처럼 미끼용 지렁이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만 되면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다 아예 집 마당에 지렁이를 키웠다. 어머니는 지렁이에 가마니를 덮고 매일 쌀뜨물을 부어주시며 강태공 부자를 위해 정성을 기울이셨다. 어머니의 지원은 상점에서 미끼 지렁이를 팔 때까지 2년여 동안 계속됐다.  


낚시회의 강태공들은 임대 관광버스로 주말마다 유명 낚시터와 산골짝에 숨은 저수지까지 구석구석 찾아 다녔다.나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단잠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나서곤 했다.  

1969년 5월 11일 오전 열한 시. 전남 장흥 안양저수지에서 열린 전국낚시대회에서 초등학교 5학년이던내가 월척을 낚아 대어 1등 상을 받았다. 회비도 내지 않고 아버지 곁다리로 참가했으니 ‘부정선수’였던 셈!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시며 그 물고기로 어탁을 만들어주셨다.지금도 재산목록 1호인 그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처럼 느껴진다.

 

아버지의 낚시사랑은 대단했다. 요즘이야 카본 같은 특수재질 낚싯대가 유행이지만, 예전엔 ‘주작’, ‘용작’, ‘공작’ 등 재미난 이름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세 토막 대나무낚싯대가 고작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제조회사에 특별 주문해 정교하게 제작된 두 토막 낚싯대도 사용하셨다. 꼬마 낚시꾼의 임무는 낚시버스가 저수지에 도착하자마자  받침대 들고 가장 빨리 뛰어가 좋은 자리 잡기, 아버지 옆에서 신속하게 밑밥 섞어 드리기, 입질이 없을 때는 얼른 옆자리로 이동해 입질 테스트 해보기, 끼니때가 되면 버너세트 설치해 식사 준비하기 등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시작된 아버지와의 낚시여행은 중3 때까지 이어졌는데 동행한 수많은 강태공 아저씨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늘 지각해 눈총 받던 김씨 아저씨, 연장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불편한 낚시의자에 앉아 다니시던 오씨 아저씨… 뒷자리에 앉아있으면 비포장도로에서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가 버스 지붕에 부딪히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앞자리를 양보하고 맨 뒷자리만 고집하던 이씨 아저씨의 머리는 아마도 항상 멍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와 나눠 드시던 박씨 아저씨, 잡은 고기를 전부 풀어주시던 ‘부처님’ 양씨 아저씨,대어상 월척상을 무조건 양보하시던 ‘신사’ 신씨 아저씨…. 참으로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 중 주씨 아저씨는 동네가게에서 사온 물고기로 대어상을 받다 발각돼 창피를 당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다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낚시 후 막걸리 안주로 드시던 두부 맛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40여 년 전의 얼굴들… 지금은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직장생활을 시작해서도 아버지 비서역할은 계속 되었다. 새로운 낚싯대나 용품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 고향집으로 보내 드렸다. 낚시의 기본은 끈기와 인내심이다. 난 급하고 덤벙대는 성격을 타고났지만 낚시여행을 하면서 많이 차분해지고 더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또 낚시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어른들께 자리를 양보하고 단체생활의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삶의 미덕을 체득한 것은 그땐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25년. 요즘도 가끔 그때의 대나무낚싯대를 본다. 인자한 미소로 꼬마낚시꾼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눈빛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안겨준 그 잔잔한 사랑은 내 가슴속에 고이고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훌쩍 커 멋지게 자라는 모습을 보거나 일이 힘에 부쳐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 생전에 좀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되어 눈가를 적신다. 아홉 살 꼬마 낚시꾼도 두 딸의 아버지가 됐다. 아버지가 주신 그런 유산을 나도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지만 아버지처럼 잘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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