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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원조 도루왕’ 김일권, “지금도 저의 본업은 ‘야구인’입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원조 도루왕’ 김일권, “지금도 저의 본업은 ‘야구인’입니다”
  • 정희
  • 승인 2018.04.26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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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야구선수 김일권에게 야구란, 신이 내린 탤런트다.” 실제 그가 걸어온 약 10년간 야구 인생에서 그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선수 중의 한명이었다. ‘야구 천재’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며, ‘그냥 타고난 실력만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선수’라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그의 야구 인생은 찬란하게 빛났다. 무엇보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도루 분야였다. 지금도 ‘원조 도루왕’으로 불리는 그는 현역 시절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도루의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한국프로야구 도루왕(1982, 1983, 1984, 1989, 1990)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현역이란 있을 수 없다. 지난 2002년 은퇴한 이후 그는 나름의 인생 굴곡을 거치기도 했다. 그를 기억하는 야구팬이라면 그의 근황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다.

 

어느 덧 60대 중반, 인생을 돌아볼 나이

그라운드를 펄펄 날아다니던 20대의 청년 김일권 선수는 이제 6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 젊었을 때에는 ‘풍운아’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어느 덧 인생을 통찰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은퇴한지는 오래됐지만, 아직도 그의 감성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에 팬들이 자신에게 보내주었던 사랑이다.  


“저는 해태타이거즈라는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그 시절이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지금 내 나이 60대 중반이 되었지만, 당시 팬들의 사랑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감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팬들의 환호, 응원, 박수는 저의 뼛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 사랑에 반하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마치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생각된다. 군산 출생으로 군산상고에서 처음으로 야구를 접한 그는 1번 타자 겸 유격수로 뛰면서 ‘역전의 명수’로 불리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다. 이후 실업무대에서 활약을 하다 한양대에 입학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프로야구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선수로서의 삶을 살게 됐다. 그는 82년 해태타이거스를 시작으로 태평양돌핀스, LG트윈스를 거쳤으며 82년 한국 프로야구 첫 단독 홈스틸, 82년 포지션별 최우수선수 베스트 10 (중견수), 골든 글러브 외야수. 1989년 한국프로야구 첫 300도루를 달성했다. 여기에 77년도 국가대표 세계대회에서 미국과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이후 2002년까지는 쌍방울 레이더스, 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주루코치를 하면서 현역에서 벗어나 코치의 인생을 살았다. 비록 은퇴를 한지 오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라운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현장에서 코치나 감독으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단 1%의 가능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가 없어요. 한때 방송국으로 해설자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설자의 길로 나서면 다시는 그라운드로 복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거절을 했고, 지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 미련은 결코 버릴 수가 없습니다.(웃음)”

 

그가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아직 그라운드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야구가 그의 인생의 전부였고, 사랑이었으며,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초중고교 야구부에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이 역시 과거 그라운드의 꿈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자뻘 되는 선수들과 어울리고 있노라면 그는 다시 1980년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더불어 그가 “지금도 내 본업은 야구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야구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도루는 심리전이다

많은 야구팬들이 그에 대해서 “발이 빨라서 도루를 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빨만 빨라서 도루왕이 된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 ‘발이 빠른 선수’로 꼽히던 선수는 모두 3명이었다. 이해창과 김재박, 그리고 김일권이었다. 정작 이 중에서 가장 빠른 선수는 이해창이었지만 도루왕 타이틀에서는 김일권에 비할 수가 없이 적었다. 거기다가 김재박은 아마추어 시절 도루와 관련된 상을 휩쓸었지만 프로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말은 곧 ‘도루는 발이 빠르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과거 김일권 선수가 그토록 많은 도루왕을 휩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도루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김일권은 세심한 관찰력과 심리전에 능한 선수였다. 우선 그는 투수의 습성을 제대로 관찰해서 허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활용해 도루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1루에서 2루로의 도루는 쉬워도, 2루에서 3루로의 도구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게 더 쉬운 일이었죠. 예를 들어 봅시다. 일단 김일권이 1루에 나갔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도루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합니다. 저는 무조건 뛰어서 2루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투수의 심리가 달라집니다. ‘설마 방금 1루에서 2루로 도루를 했는데, 그 바로 다음에 또 3루로 도루를 하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죠. 제가 역이용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진짜로 바로 다음 투구에서 2루에서 3루로 뛰었으니까요.”

 

그가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해낸 ‘홈스틸’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홈스틸을 그가 가장 먼저 시도하고 성공시켰다.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 투수는 키가 크고 3루를 등지고 있는 좌완 투수였다. 거기다가 와인드업을 하는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다. 공을 던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린다는 이야기다. 이를 간파한 그는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더구나 ‘설마 홈스틸을 하겠어?’라는 고정관념을 역이용했다. 이 역시 심리전의 하나였다.  

 

그 결과 그의 기록은 전 세계 야구인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생애 통산 1위의 도루를 했던 리키 핸더슨의 경기당 도루율은 .456이고, 일본 프로야구의 도루왕인 후쿠모토 유타카는 .444였다. 김일권 선수는 .432이다. 참여한 게임 수의 차이가 있어서 단순비교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세계적인 도루왕’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프로정신’으로 살아갈 것

하지만 그의 모든 야구 인생이 승승장구였던 것만은 아니다. 87년,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트레이드’를 당하면서 스스로 큰 고민에 빠졌다. 그는 당시의 시기를 ‘내 야구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저는 점점 교만해져 갔습니다. ‘나를 넘볼 사람은 없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생각에 대한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니 별도의 보충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능력만 믿을 뿐이었죠. 실제 그 당시의 저는 도루의 갯수를 저 스스로 조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그 다음 해에 또다시 내가 경신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올해는 53개만 하고 내년은 55개, 후내년은 58개만 하자’라는 식이었죠. 그런데 전부 다 이뤄졌고, 그것이 교만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슬럼프가 시작 됐다. 더불어 1987년 트레이드 되면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최하위 팀으로 트레이드 되었으니 그의 실망과 좌절이 어느 정도인지가 짐작될 정도다.  


“제가 해태 시절 노력하지 않은 것이 정말 후회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 때에 그 다음을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교만했던 거죠. 물론 그 이후부터 정말로 노력을 했지만, 만약 해태타이거즈 시절에 그 정도의 노력을 했더라면 저의 야구 인생은 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짧으면서 화려한, 그리고 아쉬움도 남는 야구 인생을 정리한 후 이제는 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과거 젊은 시절의 경험을 이제는 자신의 삶에 투영해서 살아가려고 한다고 말한다.  


“제가 배운 것은 프로 정신입니다. 개인 생활에 앞서는 철저한 프로의 기질, 잘 나갈 때 더 열심히 하고 쓰러질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바로 프로의 정신이죠. 앞으로도 이런 정신으로 살아갈 것이며, 또 그간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에도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인터뷰 도중 ‘그라운드’, ‘경기장’이라는 말이 나오면 유난히 눈을 반짝였다. 다시 현장의 감독이나 코치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간절함 염원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의 말 그대로 ‘1%의 가능성’일지 몰라도, 후배와 팬들은 다시 그를 그라운드에서 만나보고 싶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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