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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것’이 알려주는 어른이 되는 법
영화 ‘그것’이 알려주는 어른이 되는 법
  • 전인수
  • 승인 2017.09.1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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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것’은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 소설 ‘IT’은 탄탄한 스토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삐에로 공포증’을 야기하는 ‘페니와이즈’의 존재감과 독창적인 캐릭터가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1990년에는 동명의 TV시리즈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제작여건의 한계로 소설의 공포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TV시리즈는 ‘피의 삐에로’라는 제목으로 편집을 통해 영화판으로까지 제작됐다. 일관되지 않은 톤을 갖고 있는 영화는 영화 자체로는 아쉬움을 남기며 어설픈 공포영화의 하나로 영화사의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2017년 여름. ‘그것’이 영화 속 ‘페니와이즈’가 그렇듯이 27년 만에 돌아왔다. 페니와이즈 역을 맡은 빌 스카스가드는 기괴하고 오싹한 연기를 훌륭히 해내며 삐에로가 주는 공포를 여실히 증명했고 현재와 과거 시점 즉 어른과 소년의 시절을 오가는 소설과 달리 주인공 아이들이 사건을 파헤치는 유년에 집중한 전개는 집중도를 높여 공포영화로서의 기능에 충실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공포의 존재인 삐에로에 소년들이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하다가 주인공인 ‘루저 클럽’ 아이들이 페니와이즈에 대항하게 되면서 영화는 일종의 소동극으로 얼굴을 바꾼다. 공포의 대상이 맥없이 물리적 저항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그것’은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유년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액션 영화로 강등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그것’의 가치는 소름 돋는 오싹한 공포영화의 효과에 있지 않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성장 서사를 공포의 영화적 정서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판타지를 사랑한다. 우리가 아는 동화들의 대부분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판타지를 가정한다. 엘리스가 토끼를 따라가 이상한 세상에 당도하고, 피터팬이 하늘을 날고, 걸리버가 소인국을 만나는 것은 모두 판타지다. 아이들이 동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판타지 때문이며 판타지는 아이들이 생활속에서 절대적 약자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아이의 세계는 불가능의 세계이다. 모든 일은 부모의 허락이 필요하며 세상은 자신들보다 거대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아이들은 말이 되지 않을지언정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 속에서 강대하고 강인한 무엇으로 재탄생한다. 아이들이 판타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 조건과 전복의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판타지가 실제 현실이 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다. 상상 속 거인은 가학적 이미지가 제거된 우화적 폭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폭력은 폭력이 아닌 자리바꿈의 의자 뺏기 게임을 할 뿐이다. 동화는 그래서 동화다. 성장의 폭력은 순수한 승리감으로 전환되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기쁨만은 맛본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남들을 상처 입힐 때, 피가 흐르고 자신의 주먹에 통증이 올 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은 사실 온 생을 걸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어른이 되는 것을 유예할 때 혹은 어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압도하는 세계 속에서 공포에 떠는 존재로 남는다. 그 공포가 바로 ‘페니와이즈’다. 힘의 균형이 압도적으로 불균형한 존재, 웃으며 작은 우리들을 농락하는 존재. 조소하는 존재로서 삐에로이다.

 

‘그것’은 바로 이 ‘페니와이즈’를 이겨내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실제로 페니와이즈는 힘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할수록, 무서워하기 때문에 거대한 존재다. 사실은 누구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 즉,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원작 소설과 다르게 현재와 과거의 교차적 전개를 따르지 않고 지질한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외부대상을 이겨내는 시간들에 집중한다. 누구는 자신을 괴롭히는 상급생, 누구는 과잉보호하는 어머니, 누구는 자신을 성적 존재로 보는 아버지가 외부세계의 적들이다. 삐에로는 하수구에서 등장하지만 실제 삐에로는 주인공들의 어둡고 깊은 내부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27년마다 다시 등장해 아이들을 데려가는 삐에로는 마을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죽음으로 데려가기 시작한다. 동생을 삐에로에게 잃어버린 주인공 빌(제이든 리버허)는 아이들과 함께 삐에로를 쫓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성적인 관심이 괴로운 배벌리(소피아 릴리스)가 아이들과 합류하고 상급생 헨리(니콜라스 해밀턴)에게 칼빵을 당한 뚱뚱한 벤(제레미 레이 테일러)도 합류한다.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눈 뜨고 잃은 마이크(초슨 제이콥스)와 친구들 에디(잭 딜런 그레이저), 스탠(와이어트 올레프)가 모여 각자의 두려움에 싸움을 걸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삐에로에게 잡혀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투하기 시작한다.

 

몇 번의 위기를 겪지만 아이들은 결국 페니와이즈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각자가 갖고 있는 공포의 대상을 극복하는 실제적 행동이 교차하면서 아이들은 성장하게 된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삐에로 죽이기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동시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이별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적절히 배치되면서 공포 극복의 성장서사가 완성됐다.

 

영화 ‘그것’은 성장을 몇 가지의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성장이 아니므로 영화는 나이가 많아진다고 누구나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페니와이즈의 본거지에서 이미 사로잡힌 아이들은 공중에 떠서 무력하게 떠다니고 있는데 이들을 공포에 잡아 먹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사람으로 상정한다면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는 자들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이 되는 법을 세 가지 행동으로 확인해 보자.

 

 

 

첫 번째, 웃어라

 

영화 후반부가 되면 ‘페니와이즈’는 공포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페니와이즈를 키운 것은 아이들의 공포감이다. 공포감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수록 줄어들고 우리의 공포가 실제로 그 대상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 성장하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반감된다. 공포는 대상의 객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일 뿐이다.

 

결말부 아이들이 페니와이즈에게 대항하는 씬들에서 페니와이즈는 제각각 무서워하는 존재로 변화하는데 이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리디큘러스’. 해리포터의 주문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등장하는 이 주문은 가장 무서워하는 것으로 변하는 생물 보가트를 물리치는 방법이다. 자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에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역시 성장서사이다. 이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고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점에서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공포의 대상 앞에서 웃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대상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내가 상정하는 대상이므로 그 대상, 이 세계를 바꾸는 방법은 바로 웃음이다. 삶의 의지로 현실을 교정하는 것, 자신을 괴롭히는 끔찍한 현실에서도 대담하게 웃는 것. ‘리디큘러스’, 어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 보내줘라

 

문제아 상급생에게 ‘칼빵’을 당하는 주인공의 친구 벤은 모두가 선망하는 베벌리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시를 엽서에 써서 전달해 사랑을 고백한다. 베벌리는 이 엽서를 주인공 빌이 보낸 것으로 오해하지만 페니와이즈에게 영혼을 빼앗긴 그녀를 키스로 살려내면서 자신이 그 엽서의 주인공임을 증명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얻진 못했다. 오히려 베벌리는 뚱뚱한 벤이 자신을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빌을 선택한다. 왜일까.

 

관객들은 아이들이 베벌리의 집에 찾아가 페니와이즈의 흔적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잠시 스쳐가는 소품, 그림 형제의 동화 ‘개구리 왕자’를 주목해야 한다. 키스를 통해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는 세계가 베벌리가 믿는 세상이다. 베벌리에게 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벤이 변해 빌이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베벌리가 빌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화면을 빠져나가는 벤의 뒷모습을 둘의 모습 뒤로 담아둔다. 이때 베벌리의 개구리는 왕자로 변했다. 벤은 자신이 그녀를 구했지만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떠날 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었다고 해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타자의 세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동기로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줄 수 있다. 내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사람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벤은 빌이 되었을 뿐이다. 이는 절대 보편적인 논리가 아니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진리가 된다. 그 진리를 인정하는 것, 타인을 타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어른이 된다.

 

 

 

 

세 번째, 저항하라

 

페니와이즈를 만나고 나서 아이들은 점차 자신들을 가두고 있는 존재들에게 저항하게 된다. 베벌리는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빌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동생을 찾기 위해 떠난다. 어머니의 과잉보호에 괴로워하던 에디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친구들과 페니와이즈를 죽이기 위해 떠난다. 각자가 갖고 있는 공포의 대상에 저항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실제의 대상을 상처입힘으로써 페니와이즈에게 대항할 자신을 얻는다. 그러므로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현실적 존재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페니와이즈는 패배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승리인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에 그대로 복종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구하는 것이 무언인지 파악하고 요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저항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 아이이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상처입힌다. 때론 자기 자신마저 상처 입힐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면 결국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알고 지키는 것이 어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게 하는 것들, 아닐 수밖에 없게 하는 것들을 상처 입혀야 한다. 죄의식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어른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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